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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가르는 ‘부족’ 본능,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

미국 뉴욕의 한 시민이 2011년 10월 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요구한 ‘월가 점령시위’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다. 이 시위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 시위 참가자를 조사하면 상당수가 고학력에 소득 수준도 높은 백인이었다. “노동자 계급 미국인”은 시위에 냉담한 편이었다. 즉, 이들 두 계급은 서로 연대해야 할 순간에도 하나로 뭉치지 않았다. ‘월가 점령시위’는 미국의 부족주의가 얼마나 심각한지 드러낸 사건이었다. 신화뉴시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프로레슬링(WWE)을 좋아한다. 직접 링에 오른 적도 있다. 경기에서 그는 WWE 설립자를 때려눕힌 뒤 목 조르기로 승리를 거뒀다. 2013년 트럼프는 WWE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WWE는 그를 “WWE 슈퍼스타”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대다수 미국 백인 엘리트에게 WWE는 비인기 종목이다. “조잡하고 싸구려 같은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WWE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뒷배가 돼준 백인 노동자들이다.

즉, 미국에선 ‘WWE 마니아=트럼프 지지자’라는 공식이 얼마간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최근 국내에 출간된 ‘정치적 부족주의’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트럼프와 WWE의 관계, 그리고 그가 WWE 팬들에게 가졌던 호소력을 이해하는 것은 2016년 선거의 소우주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갈수록 높아지는 미국의 계급 장벽은 백인을 두 개 집단으로 갈라놓았다. ①자신을 “세계 시민”이라 생각하면서 도시나 연안 지역에 사는 엘리트 백인, ②인종주의적 성향을 띠지만 애국심은 투철하다고 자부하는 노동자 백인. 저자는 ①번과 ②번을 각기 다른 ‘부족’이라고 가정한 뒤 상황을 들여다봐야 트럼프의 당선 이유와 미국이 분열된 까닭을 알 수 있다고 단언한다.

‘우리 대 저들’의 세상

‘정치적 부족주의’는 부족을 이루려는 인간의 집단 본능이 세계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살핀 책이다. 국제 분쟁 전문가인 에이미 추아(58) 예일대 교수가 썼다. 핵심 키워드는 제목에 담긴 부족주의. 부족주의는 ‘고결한 우리 대 악마인 저들’이라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든다. 부족주의에 찌들면 “너희보다 우리가 받는 박해와 차별이 훨씬 큰데 무슨 소리냐”고 묻게 된다.

저자는 부족주의를 살피지 않고서는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가 백년하청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국가 간 충돌이 일어나거나, 국가 안에서 갈등이 불거졌을 때 이데올로기나 돈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 드는데 인간의 “부족 본능”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가령 베트남 전쟁을 떠올려보자. 미국은 왜 베트남전에서 패했을까. 저자는 특이한 해석을 내놓는데, 미국이 화교를 향한 베트남 민족의 적개심을 간과한 게 문제였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20세기 중반, 화교는 베트남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집단이었다. 유통 금융 교통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장악했다. 이들은 베트남 사람들과 떨어져 자신들끼리 부유한 동네를 이루고 살았다. 자식은 화교 학교에 보냈고 결혼도 자기들끼리 했다. 베트남인을 향한 태도는 배타적이었다. 베트남이 프랑스와 전쟁을 치를 때도 화교는 철저하게 “비정치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베트남 민족에게 화교는, 그리고 중국은 오랫동안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중국은 1000년 동안 베트남을 지배했다. 그다음 1000년간은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삼았다. 호찌민은 부하가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를 견제하려면 중국에 유화 정책을 펴야 한다는 의견을 내자 이렇게 쏘아붙였다. “이런 멍청이들! 나는 중국의 똥을 평생 먹느니 프랑스의 똥 냄새를 5년 동안 맡겠다.”

미국은 베트남 민족의 부족정치, 그 핵심을 이루는 이 같은 정서를 허투루 여겼다. 미국에 베트남전은 “미군을 희생시켜 가며 베트남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이었다. 한데 베트남인에게 미국이 선사하려는 자유는 화교를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미국은 전쟁에 1000억 달러를 쏟아부었는데, 그중 현지인에게 돌아가야 할 돈의 상당액은 화교에게 향했다. 남베트남 군인들은 희생할 가치가 없는 전쟁이라 여기게 됐다. 저자는 “미국은 베트남의 정치적 부족주의를 완전히 놓쳤다”며 “베트남에서 취한 거의 모든 조치가 베트남 사람들을 미국에 적대적이 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부족주의라는 렌즈를 사용하면 많은 정치적 이슈를 다른 차원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테러리즘이 대표적이다. 테러리스트는 연쇄 살인마와 달리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었던 이들이 어느 순간 테러리스트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유는 부족 본능에 이끌려서다. 바꿔 말하자면 유대감이 끈끈하고 외부를 향한 적개심이 큰 집단이라면, 이 집단에서 작동되는 부족정치는 테러리즘으로 돌변할 수 있다. “부족주의는 탈인간화를 통해 공감과 감수성을 마비시킨다. …집단 정체성을 순응의 압력을 일으켜 사람들이 혼자서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들을 하게 만든다.”

만나서 이야기하라

부족주의는 어딘가에 소속되려는 욕망이면서 동시에 누군가를 배제하려는 본능이다. 부족주의가 맹위를 떨치면 누가 더 손해를 보고 있는지 겨루는, 비생산적인 언쟁만 이어지게 된다. 통합의 열쇠처럼 여겨지는 민주주의도 부족주의 앞에서는 초라해질 때가 많다. 저자는 “(부족주의가 만연한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집단 간의 제로섬 경쟁으로 퇴락한다”고 적어두었다. 부족주의 탓에 언젠가부터 좌파들마저도 “집단을 불문하고 포용”한다는 전통을 버린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치적 부족주의’는 미국 독자를 위해 쓰인 책이다. 미국이 부족주의를 간과한 탓에 얼마나 헛발질을 했고, 어떤 문제에 당면했으며, 해법은 무엇인지를 들려준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 한국인 누구나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 대 저들’의 구도로 세상을 바라보고, 각자 속한 집단의 이야기만 들으려는 건 한국도 마찬가지여서다. 부족주의는 한국 정치를 읽는 키워드인 셈이다.

저자는 정치학이나 역사학은 물론이고 뇌과학이나 심리학까지 넘나들면서 인상적인 이야기를 풀어낸다. 미국 사회심리학자 고든 올포트는 ‘편견의 속성’이라는 책에서 “상이한 집단 간에 면대면 접촉이 있을 경우 편견을 깨뜨리고 공동의 토대를 짓고 삶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고 했다. 저자의 해법 역시 올포트의 견해와 다르지 않다. “개인과 개인이 대면해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 부족주의 해법이라는 것이다. 책에는 “하나의 나라로서 한데 모이려면 모두가 자기 자신에게서 한 발 올라와야 한다. 분열을 가로지를 어떤 기회라도 있다면 그것을 붙잡아 서로에게 이야기를 건넬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적혀 있다. 제21대 총선을 치르면서 한국사회에서 어떤 광경이 펼쳐졌는지 복기해보자. 아마도 ‘정치적 부족주의’는 한국 독자에게 적지 않은 울림과 깨달음을 선사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정치적 성향을 띤 부족으로 구성됐지만, 그 이전에 하나의 ‘공동체’니까 말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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