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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 낯익은 홍상수의 향기 [리뷰]

영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에서 예기치 않게 만난 경유(왼쪽)와 유정이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있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호기심을 마구 자극하는 제목이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이라니. 대체 어떤 손님이기에 ‘맹수의 왕’ 호랑이보다도 무섭다는 걸까. 추레한 꼴로 우연히 만난 전 연인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 혹은 비겁하게 도망쳐버린 지난날의 나 자신이라거나.

이 영화의 주인공 경유(이진욱)의 처지는 참 딱하다. 여자친구 집에서 얹혀살다 어느 겨울날 갑자기 황당한 이별 통보를 받는다. 이유는 모른다. 전화를 걸어 봐도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란 안내 음성만 들려온다. 여자친구가 그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동물원에서 호랑이가 탈출했다고 하니 조심하라”는 당부였다.

여행 가방을 끌고 터덜터덜 정처 없이 걷는데, 갈 곳이 없다. 둘도 없는 친구(서현우) 집 문을 두드려 보지만 반기는 눈치가 아니다. 회사에선 잘리고 자격증이라곤 달랑 운전면허증뿐인 경유는 대리운전 아르바이트를 한다. 물론 그마저 쉽지가 않다. 더 이상의 최악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 순간, 또 한 번의 얄궂은 운명에 맞닥뜨린다.

대리 콜을 받고 반가운 마음에 달려간 곳에 옛 연인 유정(고현정)이 서있다. 한때는 서로에게 영감을 줬던 사이. 그러나 글쓰기의 꿈을 접고 현실적인 삶을 택한 경유에게 소설가로 등단한 유정을 마주하기란 영 껄끄럽다. “잘 지냈어?” 어색한 안부를 나누고 헤어졌는데, 웬일인지 유정에게 자꾸 연락이 온다.

막다른 길 위에 서 있는 두 사람. 매우 극적으로 보이지만 실상 팍팍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극 중 실체가 없는 호랑이의 존재는 우리 내면을 떠도는 여러 두려움에 대한 은유다. 그 두려움 앞에 굴복하지 말라고, 비겁하게 피하지 말고 당당하게 마주하라고 영화는 역설한다.

홍상수 감독의 조감독 출신인 이강국 감독의 세 번째 연출작으로, 그의 이력이 이 영화에서는 떨쳐낼 수 없는 단점으로 발현된다. 홍상수 화법을 그대로 가져오다 보니 그저 그런 또 한 편의 ‘홍상수스러운’ 작품이 만들어졌다. 주어진 상황도, 등장하는 인물도, 그것들을 엮어내는 연출도 기막히게 새롭지 않다는 얘기다.

그나마 배우들의 연기가 극을 좀 더 흥미롭게 한다. 고현정은 복잡미묘한 인물을 자신만의 독특한 리듬감으로 풀어낸다. 꽁꽁 눌러 담아뒀던 감정을 끌어내 분출하는 장면에서의 이진욱은 인상적이다. 이 영화로 자신의 ‘재기’를 알리고 싶다는 그의 야심찬 바람이 아주 허튼 것만은 아닌 듯하다.

성추문에 휩싸였다가 무혐의 처분을 받은 후 한동안 활동을 중단했던 이진욱은 이 영화로 스크린에 복귀한다. “경유라는 캐릭터에 심정적으로 공감이 됐다”는 그는 “살면서 곤경에 처할 땐 얌전히 지나가길 기다리는 게 방법이란 걸 깨달았다. (꿈을 접었던) 경유가 다시 펜을 들 듯, 이 작품이 내게 재기의 단초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12일 개봉. 15세가.

권남영기자 kwon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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