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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김지방] 믿음과 의리



기아자동차는 노동조합의 통상임금 소송에서 신의성실의 원칙을 내세웠다. 노조가 더 받아야겠다고 요구한 금액만 1조원이고, 지난달 31일 1심 판결에서 인정된 금액도 4223억원이나 된다. 기아차와 재계는 향후 산업계 전체가 부담해야 할 금액이 3조원을 넘는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법과 판결에 따라 정당하게 추가임금을 요구한다고 해도 지나치면 안 된다는 논리였다. 회사가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경영이 어려워지게 생겼으니 이는 신의(信義), 즉 노사 간에 마땅히 있어야 할 믿음과 의리를 저버리고 노조의 이익만 지나치게 추구한 행동이라는 게 회사와 재계의 주장이었다. 1심 법원에서는 “경영상의 어려움은 모호하고 불확정적이어서 엄격하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의성실의 원칙 자체는 중요하다. 노사는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가는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1심 판사도 “판결하기에 앞서 쌍방에 조정이나 화해의 뜻이 있는지 물었다”며 “1심 선고 후에 화해 가능성이 있다고 하니 이번 선고가 양측의 갈등을 봉합하고 화해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출발점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당부했다. 민법도 제2조에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권리는 남용하지 못한다’는 조항까지 덧붙여 놓았다. 아무리 권리가 보장돼 있더라도 사회구성원으로서 믿음과 의리를 저버리고 권리만 주장해선 안 된다는 취지다.

노사 간에 신의를 저버린 행동을 꼽자면, 통상임금 소송보다는 회사가 노조를 상대로 거액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행위가 더 먼저 아닐까 싶다. 불법 파업은 물론이고 합법적 파업과 시위집회 와중에 일어난 노사 간 충돌에도 일단 수천만원부터 수백억원까지 손해배상 소송부터 제기하고, 판결이 나기도 전에 가압류까지 하는 일이 빈번하다.

시민단체 ‘손잡고’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까지 회사가 노조에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금액이 1867억원에 이른다. 기아차 한 곳의 통상임금 소송액보다는 훨씬 적지만, 소송 대상인 노동자 개개인에게 부과되는 무게는 그야말로 살인적이다. 거액의 배상금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실제로 손실이 커서 꼭 배상을 받겠다는 것도 아니다. 회사가 직원을 회유하고 압박하는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더 많다. 노조를 탈퇴하면 배상요구도 철회하겠다는 식이다.

지난해 촛불집회가 열리기 직전까지 1년 동안 서울광장 한쪽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옥상 전광판 위에서 기아차의 사내하청업체 소속 노동자 2명이 고공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정몽구 회장을 비롯한 기아차 경영진에게 법원 판결대로 불법사내하청 직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촉구하는 현수막을 들었다가 5억7000여만원의 배상금을 물고 있다.

현대차도 2010년 7월 대법원에서 사내하청이 불법이라는 판결을 받았는데, 하청업체 직원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점거농성을 벌이자 200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다. 불법파견 직원을 정규직으로 인정하라는 판결을 회사는 지키지 않으면서 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이들에겐 법의 이름으로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한 셈이다. 노동자를 상대로 한 손배소부터 철회한다면, 신의성실을 주장하는 목소리를 듣기가 덜 겸연쩍겠다.

정부가 시민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한 금액도 67억4400만원에 이른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촛불집회를 청와대 뒷산에서 지켜보았다”며 사과하자마자 경찰은 집회에 참여한 시민을 추적해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2009년 8월 쌍용차 평택공장에서 농성 중이던 직원들을 경찰이 헬기와 기중기를 동원해 진압한 뒤 16억7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낸 사례도 있다. 이런 경찰이 인권경찰로 거듭나겠다며 더 큰 권리를 달라고 하는데, 과연 믿음과 의리를 지켜줄지 의문이다.

김지방 사회부 차장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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