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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춘추-이명희] 청백리는 아닐지라도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淸白吏)다. 그는 백성들이 풀뿌리로 연명하는데 고기를 먹을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항복을 비롯한 다른 정승들이 소식(小食)하다 몸을 상하겠다며 임금에게 건의했을 정도다. 이원익은 늙어 직무를 맡을 수 없게 되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내자 사람들은 그가 재상인 줄 몰랐다고 조선실록은 전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인조가 극구 사양하는 이원익을 겨우 설득해 하사한 집이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있는 ‘관감당(觀感堂)’이다.

다산 정약용은 “이 한 사람으로 사직의 평안함과 위태로움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백성의 여유로움과 굶주림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외적의 진격과 퇴각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윤리도덕의 퇴보와 융성이 달라졌다”는 글을 지어 극찬했다.

이원익처럼 청렴하고 가빈하게는 아니더라도 공직자라면 모름지기 물욕을 멀리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야 불편부당하고 서민들의 고충을 헤아려 따뜻한 정책을 펼 수 있다고 믿는다. 보통 사람은 잘 모르는 코스닥 주식에 투자해 1년 반 만에 10억원 이상을 벌어들인 헌법재판관 후보자, 해군참모총장 퇴임 후 로펌과 방산업체로부터 자문료로만 12억원을 받고 “서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세상이 있다”고 말하는 국방부 장관, 이런 사람들이 힘없고 억울한 서민들 세계를 이해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도 개미들을 울린 ‘작전주’로 의심받았던 종목을 절묘한 시점에 사고팔아 재테크의 귀재라는 평가를 받는다니 사회적 약자 편에 서겠다는 인사청문회에서의 다짐이 공허하게 들린다. 두 사람 모두 보통 사람이었다면 내부자거래 의혹이나 뇌물수수 의혹으로 금융 당국 조사나 검찰 수사를 받았을 것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 만들기를 최우선 국정과제로 내건 문재인정부의 공직자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국민들에게는 사는 집 빼고 모두 팔라면서 이유야 어찌 됐든 정작 자신들은 2채 이상 집을 갖고 있는 청와대 계신 분들도 마찬가지다.

문재인정부가 출범한 지 100일이 넘도록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인선이 늦어진 데는 주식 백지신탁 문제가 컸다고 한다. 청와대는 중소기업청에서 부로 승격되는 첫 장관인 만큼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 운영 경험이 있는 상징적 인물을 찾고자 했다. 10여명을 후보군에 올려놓고 의사를 타진했지만 상당수 후보자들이 손사래를 쳤다는 후문이다. 공직자윤리법에 재산공개 대상 고위 공직자가 직무 관련 주식을 3000만원 이상 보유한 경우 이를 매각하거나 백지신탁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직에 있으면서 사익을 위해 특정 기업에 유리한 정책을 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소액주주 운동을 해 온 장하성 교수가 청와대 정책실장에 임명되면서 54억원의 주식을 매각한 것도 이 때문이다. 기업인 출신 장관 후보자들은 공직보다 회사 경영권을 포기할 수 없었던 거다. 그마저 고르고 고른 자칭 ‘흙수저’라는 장관 후보자가 이승만 독재를 찬양했다고 해서 논란이 되고 있으니 이번엔 어디 가서 인물을 찾아와야 할까.

엊그제 정부가 발표한 내년 예산안 중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저소득층 대학생들에게 해외연수 기회를 제공하는 ‘파란 사다리’ 제도다.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아주대 총장 시절 만들었던 ‘애프터 유(After you)’ 프로그램이 정부 정책으로 나온 것이다. 부와 사회적 지위의 대물림이 고착화된 사회에서 교육을 통해 끊어진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복원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잘 알려진 대로 김 부총리는 청계천 판잣집 소년가장에 상고와 야간대학 출신으로 어려운 이들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런 정책이 나올 수 있다고 본다. 김 부총리 같은 공직자가 많이 나와야 하는 이유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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