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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근 목사의 묵상 일침] 안녕하세요



국어에서 ‘안녕(安寧)’이라는 말은 ‘아무 탈이나 걱정이 없이 편안함’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물론 ‘안녕하세요’란 인사를 건넬 때는 이런 속 의미까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비슷하게 헬라어에서 ‘카이로’라는 단어는 ‘기쁨’ ‘행복’ 같은 의미가 있는 말이지만 ‘안녕하세요’ 같은 가벼운 인사말로도 사용된다. 마태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찾아 무덤에 왔던 여인들에게, 그 가벼운 인사를 건네시는 장면을 기록한다. “평안하냐.”

예수님은 가벼운 인사로 부활 후 처음 만난 이들을 맞이하셨다. 사실 너무 평범한 인사다. 부활이라는 우주적이고 위대한 사건이 일어난 직후 건넨 말인데, 더 멋지고 웅대한 말씀을 하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혹시 이 단순한 인사말에 예수님께서 담아내시고자 하신 다른 뜻이 있으셨던 것은 아닌지 한참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인사말은 마태복음의 앞선 몇 장면에서 등장한 바가 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군병들에게 넘기기 위해 군호를 짜서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러고는 ‘랍비여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하면서 예수님께 입을 맞춘 뒤 팔아넘겼다.

또 다른 장면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 군병들이 예수님을 희롱하는 대목이다. 군병들은 예수님께 가시관을 씌우고는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하라’고 인사하면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건넨 평범한 인사는 모두 예수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것들이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이 있다. 그 책에서 소개된 중요한 개념이 ‘악의 평범성’이다. 모든 사람이 당연시하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들이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룟 유다와 군병들이 예수님께 건넨 ‘안녕’이란 인사가 바로 그런 악의 평범성을 시사한다.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조롱하고 모욕한 사람들은 적어도 겉보기에 대단한 악마들이 아니었다.

다시 부활의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인사를 건네셨다. 평범함의 힘은 그것을 빼앗겼을 때야 인식할 수 있다. 지난 2년 넘게 우리는 그것을 뼈저리게 경험하지 않았는가. 친한 사람과 만나 밥 한 끼 먹으며 수다 떠는 일, 주일에 예배당에 나와 예배하고 교제하는 그 평범한 일들이 우리 삶을 지탱해 주는 얼마나 대단한 힘이었는지를 말이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바로 그런 평범함에 있다. 진정한 신앙은 특별하고 비범한 일이 아니라 매일의 평범함 속에서 그 진가가 발휘된다. 멋있는 미사여구로 가득 찬 기도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순해 보이는 매일의 간구에 진짜 힘이 있다. 그러므로 끼니때마다 드리는 기도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식사 기도야말로 생명의 근원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확인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신앙을 대단함과 특별함을 추구하는 여정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세상을 뒤엎을 만한 프로젝트가 하나님의 비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의 교회와 성도들이 좀 더 담백한 신앙을 추구했으면 한다. 대단한 성과가 아니어도 괜찮다. 그저 인사말처럼 평범한, 그러나 매일의 반복을 통해 은근한 힘을 뿜어내는 신앙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건넨 평범한 인사를 통해 선한 능력을 보이셨다. 우리는 평범한 삶에 닮긴 강력한 힘을 성경과 역사를 통해, 그리고 매일의 일상을 통해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 또한 성도들의 평범한 일상을 통해 나타난다. 하나님은 가벼운 인사처럼 반복되는 믿음의 발걸음을 통해 세상에 선한 능력을 펼쳐내길 원하신다. 한마디 말을 허투루 내뱉을 수 없고, 오늘 마주칠 사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삼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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