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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장지영]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페미니즘의 기원은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혁명의 산물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남성만을 대상으로 하자 작가 올랭프 드 구즈를 비롯해 지식인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여성의 권리를 요구하고 나섰다. 구즈는 여성 참정권을 주장하는 벽보를 붙이던 중 체포돼 ‘자신의 성별에 적합한 덕성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죄목으로 사형됐다. 단두대에 오른 구즈는 “여성이 사형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의정 연설 연단 위에 오를 권리도 당연히 있다”는 말을 남겼다.

구즈의 사형과 함께 지식인 여성들의 투옥으로 당시 프랑스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은 좌절됐다. 하지만 구즈의 영향을 받은 영국 작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여성의 권리옹호’(1792)를 통해 여권운동의 사상적 근거를 정리함으로써 페미니즘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여러 나라에서 여성들이 참정권 문제를 동시다발적으로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참정권이야말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기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성들로만 이뤄진 의회는 매번 여성 참정권 요구를 부결시켰다.

그러다가 뉴질랜드에서 1893년 세계 처음으로 여성 참정권이 허용됐다. 케이트 셰퍼드가 이끄는 여성 단체가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는 서명 및 청원운동을 집요하게 벌인 덕분이다. 이후 호주(1902) 핀란드(1906) 노르웨이(1913) 소비에트연합(1917) 등이 차례차례 여성 참정권을 부여했다.

당시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한 나라로 꼽히던 영국은 여성 참정권에 대해 자치령이던 뉴질랜드나 호주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밀리센트 포셋과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를 중심으로 영국 여성들은 끊임없는 투쟁에 나섰다. 특히 온건한 포셋에 비해 팽크허스트는 전투적인 방식을 택했다. 처음엔 비폭력 투쟁을 전개했지만 계속 외면당하는 것은 물론 탄압까지 당하자 1908년부터 투쟁 방식을 바꿨다.

‘말이 아닌 행동’이라는 슬로건에 따라 서프러제트(참정권 운동 참여 여성)들은 상점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우체통에 불을 지르는 등의 방법을 통해 여성 참정권을 이슈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팽크허스트를 비롯해 1000명이 넘는 여성들이 체포되고 교도소에 수감됐다. 이들은 감옥 안에서도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1913년 에밀리 데이비슨이 여성 참정권을 알리기 위해 국왕의 말에 뛰어들어 목숨을 잃는 순교를 감행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18년 영국 의회는 비로소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허용했다. 사실 1·2차대전 기간 여성 노동력을 동원할 필요성이 커진 각국 정부는 여성 참정권을 주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성 참정권 요구로 본격 발화된 페미니즘은 이후 사회에서 실질적인 남녀평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그동안 가정, 학교, 직장 등 삶의 영역에서 차별을 없앨 것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이어져 왔다.

지난해 10월 할리우드 거물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 스캔들로 촉발된 ‘미투 운동’은 페미니즘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있다. 전 지구촌에서 권력형 성범죄 고발에서 시작해 불평등한 사회구조의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 언론은 미투 운동에 대해 여성 참정권 이후 페미니즘 역사상 최고의 혁명이라고 평가할 정도다.

한국에서도 지난 1월 말 서지현 검사의 폭로를 계기로 사회 각 분야에서 고발이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이 용감하게 나선 덕분에 각 분야 거장과 권력자들의 추악한 성범죄가 드러났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의식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앞으로도 갈 길이 멀지만 한국 여성들은 이제 미투 운동을 계기로 남성 중심의 억압적인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해 싸워야만 한다는 것을 확실히 배웠다. 그리고 모두가 힘을 합치면 승리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장지영 국제부 차장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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