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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하윤해] 슬픈 자화상



1969년 10월 20일 서울운동장(옛 동대문운동장)에는 한국과 호주의 70년 멕시코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전을 보기 위해 2만5000여명의 관중이 몰렸다. 수백만의 국민들이 TV와 라디오로 이 경기를 시청했다. 호주에 승점이 뒤졌던 한국으로선 월드컵 진출을 위해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경기였다. 한국은 전반 26분 선취골을 넣었으나 후반 13분 한 골을 내줬다.

1대 1 상황이 팽팽하게 이어지던 후반 20분 한국의 스트라이커 이회택이 호주 선수의 반칙으로 페널티킥을 얻었다. 키커로 나선 선수는 임국찬. 가장 킥이 정확했던 미드필더였다. 한 신문은 다소 과장된 어조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많은 관중과 시청자는 이 순간을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눈을 감고 성공을 기도하는 자세였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끝내 외면했다. 임 선수가 찬 볼은 힘없이 굴러 호주 골키퍼 코리의 가슴에 안겼다. 한국 축구의 월드컵 가는 길이 막히는 순간이었다.’ 경기는 1대 1 무승부로 끝이 났고, 한국은 탈락했다. 모든 비난은 임국찬에게 쏟아졌다. 결국 그는 미국 이민을 택했다.

하지만 스포츠에서 우리 국민들의 분노 대상은 대개 외국 선수였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할리우드 액션’으로 김동성의 금메달을 가로챘다며 우리 국민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은 미국의 안톤 오노가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우리 국민들이 태극마크를 단 우리 대표선수에게 거센 분노를 표출하는 이례적인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오른 ‘김보름 박지우 선수의 자격박탈과 적폐 빙상연맹의 엄중 처벌을 청원합니다’라는 글에 22일 현재 56만여명이 동의하고 있다.

지난 19일 평창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팀추월 준준결승 레이스에서 김보름 박지우가 거의 같이 2분59초 후반대로 결승점을 통과했고, 노선영은 이보다 3.8초 정도 뒤인 3분03초76에 들어왔다. 앞서 달린 두 선수와 노선영의 거리 차이는 약 40m. 이 레이스는 패배보다 더 큰 실망감을 안겨줬다. 김보름 박지우가 경기 직후 가진 인터뷰는 국민적 분노라는 불덩이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김보름은 지난 20일 인터뷰에서 “경기장의 큰 응원 때문에 워낙 거리가 벌어진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이어 “세 명의 선수들 모두 3위를 목표 삼았고 꼭 4강에 진출했어야 했다. 마지막 두 바퀴는 29초로 가야 했다.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오직 29초대에만 집중했다. 결승선에 와서야 언니(노선영)가 뒤에 있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동료를 뒤에 두고 역주한 두 선수의 모습이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라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준결승 진출에 실패하더라도 내 잘못은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두 선수가 가속을 냈던 것은 아니었는지, 동메달이라는 거대한 목표 앞에 동료에 대한 배려 정도는 내팽개쳐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파벌 싸움에 익숙한 어른들을 보며 20대 젊은 선수들도 무의식적으로 다른 동료를 무시해도 된다는 그릇된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4년을 피땀 흘려 운동했는데 동료 때문에 내 꿈이 산산조각 났다는 원망을 레이스 도중 하지는 않았는지 하는 여러 복잡한 생각과 의심들이 꼬리를 물었다.

3.8초라는 시간적 간격과 40m라는 물리적 간격은 우리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노출한 단면이다. ‘네 탓’에 익숙하고, 목표 앞에서는 어떤 희생도 감수돼야 한다고 믿는 결과주의가 두 선수의 스케이트를 재촉하지 않았는지 하는 반성이 든다. 뒤처진 동료가 있어도 나 자신과 내 자녀만 앞서가면 괜찮다는 풍조 속에서 우리 모두가 앞서 달린 두 선수와 얼마나 다를까 하는 자성도 하게 된다.

이번 여자 팀추월 사건이 공동체의 중요성을 되새기는 중요한 계기가 됐으면 한다. 또 스포츠 현장에서 계파와 패거리, 파벌을 청산하는 시작점으로 작용하기를 기대한다.

하윤해 정치부 차장 justi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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