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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김남중] ‘합리적 차이’라는 말



서울시내 지하철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에는 1300여명의 무기계약직이 있다. 스크린도어 정비, 차량 검수, 철도 정비, 역무 등에 종사하는 인력들과 지하철 보안관, 운전기사, 구내식당 주방 인력이다. 이들은 원래 하도급업체 소속이었다가 지난해 하반기 공사에 직고용됐고 고용이 보장되는 무기계약직 신분이 됐다. 서울시는 2012년부터 시 산하 투자·출연기관의 비정규직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 왔다.

지난 7월 서울시는 산하 투자·출연기관에서 일하는 3000여명의 무기계약직을 내년부터 모두 정규직화 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후로 기관별로 정규직 전환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서울교통공사에서도 지난 9월부터 노사협상이 시작됐다. 그러나 아직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막상 협상을 시작해보니 기존 정규직들의 반발이 예상보다 컸다. 정규직 수백 명은 전환에 우호적인 노조에 탈퇴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따로 모임을 만들어 공사가 추진하는 정규직 전환 방식에 조직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고시원에서 죽기 살기로 몇 년을 매달려 필기시험에 면접까지 봐야 7급인데, 단순 인성면접만 봐도 7급이라니 이건 누가 보아도 역차별이다. 우리는 이런 역차별에 대해서 합리적 차이를 두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지난 27일 ‘합리적 정규직 전환을 위한 서울교통공사 연대모임’이 발표한 성명이다. ‘합리적 차이’라는 말이 눈에 띈다. 합리적 차이는 인천공항공사 등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진행되는 곳에서 기존 정규직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원칙적으로 정규직 전환에 반대하진 않는다, 그러나 기존 정규직과 똑같은 조건으로 전환해선 안 된다, 어떤 식으로든 차이를 둬야 한다, 그 차이는 합리적인 것이고 또 합리적인 수준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를 가진다.

합리적 차이란 말은 “차별 없는 정규직 전환”이라는 비정규직들의 요구와 대립할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들은 합리적 차이란 또 다른 차별이라고 본다.

서울교통공사의 전환 협상은 사실 이 합리적 차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에 집중됐다. 노사협상 테이블에는 1∼7급 기존 정규직 체계 아래 무기계약직을 위한 8급직 신설, 7급으로 하되 기존 정규직보다 6급 승진 기간을 2∼3년 늦추는 승진유예기간 설정, 직급은 정규직과 같게 하되 호봉에서 마이너스를 주는 마이너스 호봉제 도입, 군 경력과 무기계약직 근무경력 불인정 등 차이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올라왔다. 협상 테이블 바깥에서는 업무는 정규직화 하되 사람은 다시 공개채용 방식으로 선발해야 한다는 주장, NCS(국가직무능력표준)와 전공시험을 실시해서 통과한 경우만 정규직화 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어졌다.

서울교통공사에서 무기계약직이 정규직이 된다고 해서 기존 정규직의 임금이나 복지 수준이 낮아지는 건 아니다. 임금 인상분 등 전환 비용 전체는 공사가 책임진다. 그런 점에서 정규직의 반발은 실제적인 불이익에 대한 우려라기보다는 심리적인 거부감에 가깝다.

“자기들은 공부 열심히 해서 시험 보고 공채로 들어왔는데, 계약직으로 입사한 사람들을 정규직으로 해준다니까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무기계약직 협의체를 이끌고 있는 임선재 공동대표의 말이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정규직들 사이에서 전환 반대 여론이 특히 높다고 한다.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을 놓고 ‘불공정’ ‘특혜’ 심지어 ‘반칙’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합리적 차이를 말하는 이들을 이해 못할 건 없다. 둘 사이에 어떤 차이를 둬야 할 것이냐는 전환 협상에서 진지한 주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합리적 차이나 공정성을 좀 더 공정하게 말하려면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그동안 받아온 불이익과 차별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 “시험만이 공정하다”는 믿음 역시 출발선의 불공정성을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김남중 사회2부 차장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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