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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하윤해] 냉전시대 회담장의 조크



냉전이 막바지로 치달았던 1988년 3월 23일 에드아르트 세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이 미국 백악관을 찾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조지 H 부시(아버지 부시) 부통령, 조지 슐츠 국무장관 등이 배석했다. 주요 의제는 미·소 간 핵무기 감축, 그리고 당시 개막 6개월도 남지 않았던 88서울올림픽의 안전 문제였다.

딱딱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썰렁한 조크를 먼저 던졌던 사람은 부시 부통령이었다. 그러자 레이건이 나섰다. 그는 회담 도중에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대한 조크를 하나 하겠다”고 화제를 돌렸다. 레이건은 “스피드를 즐기는 고르바초프가 직접 차를 몰다가 소련 경찰의 과속 단속에 걸렸다. 경찰은 운전자를 보자마자 ‘그냥 가라’고 말했다. 경찰은 고르바초프를 운전기사로 쓸 정도의 사람이면 뒷좌석에 어마어마한 사람이 앉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농을 던졌다.

조크 대상에 성역은 없었다. 자국 지도자를 소재로 한 농담에 세바르드나제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나도 하나 하겠다”며 가세했다. 세바르드나제는 “레이건, 고르바초프,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천국에 갔다. 하나님이 심판대 앞에서 레이건, 고르바초프 순으로 불러 그들의 업적을 물었다. 대처 순서가 됐다. 하나님이 ‘내 딸아, 너는 무엇을 했느냐’고 질문했다. 그러자 대처가 하나님을 향해 ‘첫째, 나는 당신의 딸이 아니며, 둘째, 지금 당신이 나의 자리에 있다’고 따졌다”는 조크를 던졌다. ‘철의 여인’이었지만 안하무인이라는 비판도 받았던 대처를 꼬집은 농담이었다.

재미를 붙인 레이건이 “천국 얘기가 나온 김에 하나만 더 하겠다”고 이어갔다. 그는 “세 사람이 천국의 문 앞에 섰다. 그런데 자리가 하나 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는 가장 오래된 직업을 가진 사람만이 앉을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외과의사가 나섰다. 그는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해 하와를 만드는 수술을 했기 때문에 내 직업이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 번째는 건설 기술자였다. 그는 ‘하나님이 6일 간의 혼돈을 끝내고 천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내 직업이 가장 오래됐다’고 강조했다. 세 번째 사람은 경제학자였다. 그는 ‘그 혼돈을 누가 만든 것인지 아세요’라고 되물었다”고 말했다.

세바르드나제는 “그 조크는 소련의 국가계획위원회 얘기 같군요”라고 받았다. 소련 공산주의 경제정책을 기획했지만 실패만 거듭했던 자국의 국가계획위원회를 미국 대통령 앞에서 비꼰 것이었다. 그러자 슐츠 국무장관이 “저는 미국 하원을 얘기한 것 같은데요”라고 응수했다. 미국 장관이 혼돈의 주범으로 자국 의회를 지목한 것도 재밌다. 이 회담 내용을 세세히 기록한 백악관의 기밀해제 문서를 읽을 때 레이건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이 회담은 같은 해 5월 29일부터 6월 2일까지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미·소 정상회담의 사전 준비회담 성격을 띠고 있었다. 2개월 뒤의 미·소 정상회담에서 역사적인 ‘중거리핵전력 감축 협정 비준문서’가 교환됐던 것을 감안하면 이 회담의 성과는 상당했다. 역으로, 이렇게 회담 분위기가 좋은데, 결과가 안 좋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지금 국제 정치나 국내 정치나 답답한 일들의 연속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5분간의 정상회담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골프장에서 넘어진 것을 소재로 조크를 나눌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청와대가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에 “한·미 관계가 위대한 동맹임을 재확인했다”고 자화자찬한 것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거친 말들만 오가는 국내 정치도 마찬가지다.

격조 있는 조크는 정치 세계의 윤활유다. 당신과는 남의 ‘뒷담화’도 나눌 수 있다는 신뢰와 여유의 상징이기도 하다. 핵무기로 상대를 겨눴던 미국과 소련도 회담장에서는 조크를 나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이다.

하윤해 정치부 차장 justi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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