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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이나미] 존엄한 노년을 소망한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이 다가오면 올 한 해 또 내가 무슨 죄를 짓고 무슨 실수를 했나, 짚어 보는 게 습관이 됐다. 나이 들수록 후회와 부끄러움이 더 진해진다. 치기나 경험 부족이라는 핑계를 더 이상 댈 수 없기 때문이다. “추하게 늙어간다” “벌써 치매가 온 것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나이가 됐으니 처신하는 것이 더 두렵다. 올해는 특히 모교에 돌아가게 되면서, 나이만 들었지 여러 가지로 부족하다는 사실을 더 절감하게 되는 순간들이 적지 않다. 후배들에게 정신 치료를 전수해 주는 분야가 내 전공이지만, 정신분석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는 너무 많이 발전한 진료 환경도 낯설기 때문이다. 다양한 신약, 새로운 의료기술들 때문에 마치 도시 구경 처음 하는 촌사람처럼 압도된다. 까마득한 후배들에 비해 너무 많은 것에 무지한 선배이기에, 후배들에게 귀찮고 성가신 존재는 아닌지 걱정된다. 가능하면 쓸데없이 나서지 않으려는 이유다.

어쩌면 이런 경험들은 나이 먹어가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것 아닐까 싶다. 젊은이들에 비해 경험했던 정보도 더 많고, 삶의 지혜도 웅숭깊어서 노인들에게 절로 공경심이 생겨 변화가 거의 없었던 농경사회와 달리 빛의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기술의 현대사회에서 존경받는 연장자가 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새로운 것을 습득하는 능력이 조금씩 퇴보해 가는 나이가 든 이들로서는 나눠줄 지식도 지혜도 말라가는 것 같으니 방해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여긴다.

물론 멋진 노년을 보내는 어르신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이 들수록 여기저기 병든 곳도 많아져 젊은이들에게 힘든 것을 맡기며 편하게 지내고 싶은 유혹도 잘 물리치고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분들도 있다. 젊은이에게도 깍듯하게 존대하고, 동등하게 대접하니 오히려 존경받기도 한다. 경험이 많고 살면서 알게 된 지식도 많아 그렇지 못한 젊은이들의 실수나 단견을 지적하고 싶을 순간도 많을 터인데, 그런 마음도 잘 참아내는 것 같다.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얻은 지식은 지혜로 연결되지 않고 그냥 나가기 마련이니, 급하게 가르치려 드는 게 소용없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일까. 한편으로는 젊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더 보람될 수 있다는 열린 태도도 갖고 있다. 그런 롤모델이 있다 해도, 앞으로 닥칠 노년의 삶은 여전히 두렵다. 연명의료기에 의존하거나 치매에 걸린 채 간병인에게 수치스러운 부분까지 맡겨야 하는 연옥의 시간에 갇히지 말라는 보장도 없고, 몸과 마음의 총기가 사라진 후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비교적 건강한 지금으로서는 장담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학이 발전되지 않아 병들면 자연스럽게 죽어갔던 과거에는 오히려 죽음 준비가 덜 복잡했을 것도 같다. 지금은 워낙 의술이 좋다 보니 몸도 마음도 전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데, 의지와 상관없이 기계들의 도움으로 한없이 무의미하게 수명이 연장되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 아무리 관리를 철저히 해도 이유 없이 찾아오는 만성질환, 암, 낙상, 뇌질환의 끝자락을 견디는 것이 죽음보다 더 힘들어 보인다. 의사나 보호자에게 결정권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맨 정신으로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권리가 현재의 법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도 안타깝다. 가족에게 둘러싸여 따뜻하게 보살핌 받다가 세상을 떠난다는 박제된 신화만 고집하기보다는 연명기기에 고문 받지 않도록 몸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암으로 오래 고생했지만 낫는다는 희망이 없었던 프로이트는 안락사를 선택했는데 그의 선택을 비난할 수 있는 자격이 과연 내게 있는지 모르겠다.

젊은이가 누려야 할 축복과 권리를 빼앗은 채 소음과 쓰레기만 배출하는 쓸모없는 노인이 되지 않기를, 떨어져 소멸하는 낙엽이나 때가 되면 죽기 위해 공동체에서 사라지는 코끼리처럼,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소멸하는 존엄한 노년을 보낼 수 있기를 감히 소망하게 되는 추운 겨울이다.

이나미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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