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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한승주] “포항 친구들 잘됐으면 좋겠어”



지난 15일 저녁,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일주일 연기된다는 사상 초유의 소식이 전해졌을 때 수험생 엄마인 나는 맥이 확 풀렸다. 지난 1년간 수능에 맞춰 아이의 컨디션을 조절하고, 모든 계획을 맞췄는데 갑작스러운 지진으로 연기되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100m 달리기하려고 자세 잡고 출발 총소리만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경기가 미뤄졌다니 힘이 쫙 빠지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의외로 당사자인 고3 딸은 침착했다. “할 수 없지 뭐. 내일 시험 보면 포항 애들한테 너무 불리하잖아.” 그러곤 반 친구들의 단체 카톡방을 보여주는데 “포항지역 피해가 생각보다 심각하더라. 포항 애들 잘됐으면 좋겠다”라는 내용이 가득했다.

우리 아이뿐 아니다. 트위터 등 SNS에는 이와 비슷한 내용들이 많이 올라왔다. 이정렬 전 부장판사도 고3 딸의 단톡방에 올라온 친구들과의 대화를 전했다. “경주 지진 때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 수능 연기하는 거 보니 ‘나라다운 나라’가 된 것 같다”라는 내용이었다. 지난해 고3 담임교사였다는 한 네티즌이 쓴 글도 인상적이었다. 그는 “이번 수능 연기는 우리나라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될 것 같다”고 했다. 여태껏 우리가 살던 대한민국은 효율성과 안전, 다수의 불편과 소수의 불이익이 충돌할 때 늘 다수의 효율성이 우선시되는 나라였다. 그러나 이번 결정으로 수십년간의 패러다임이 순식간에 바뀌었다는 분석이다. 온라인 기부 사이트에는 또래 수험생들의 응원 메시지와 1000원 5000원 소액 기부가 이어졌다. 뜻밖의 수능 연기는 새삼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 세대는 확실히 부모 세대와는 많이 달라졌다. 1960, 70년대에 태어난 수험생 부모들은 소수를 배려하는 사회에 익숙하지 않았다. ‘설마 어떻게 되겠어’ 하며 안전 문제는 대충 넘어가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렇게도 많은 ‘인재(人災)’를 겪어야만 했다.

이를테면 이렇다. 내일 여진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수능을 연기한다고? 약 60만명의 수험생과 그 가족들, 출제위원 등을 생각해 보라고. 게다가 수능 이후 줄줄이 예정된 면접과 논술시험은 다 어떻게 하려고? 예전이라면 아마도 이런 논리가 더 우선시됐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달랐다. 내가 힘들고 불편하더라도 누군가 피해보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 누구도 공정경쟁에서 밀려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있었다. 또 천재지변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으니 나도 언제든 겪을 수 있는 일이고, 그럴 경우 내가 그랬듯 다른 이들도 나를 배려하고 이해해줄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세월호 참사를 겪은 1999년생 아이들은 가장 살기 좋은 나라는 ‘안전한 나라’라는 걸 몸으로 깨닫고 있는 듯했다. 국가 재난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는 공동체 의식이 어느새 배어 있었다.

딸은 지난주 예비소집일, 오랜만에 일찍 끝나는 학교를 빠져나오며 3년 만에 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이제 맛없는 학교 급식도 야간자율학습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정말 기뻤단다. 그런데 ‘타임 슬립(time slip)’ 드라마처럼 또 내일이면 다시 예비소집일이다. 우리 수험생들이 다시 한 번 상쾌한 바람을 느끼며, 설레고도 긴장된 출발선에 서길 바란다.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이자.

갑작스러운 상황에 불평하기보다는 나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친구들을 생각하는 기특한 수험생들. 그래서 이들이 이끌어 나갈 미래의 대한민국은 더 밝을 것 같다. 우리 아이들은 시험 문제 하나 더 맞히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따뜻하고 착한 심성과 성숙한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으니까. 이제 며칠 안 남았다. 한 주 늦었지만 대신 모두 공정하게. 모든 수험생, 특히 지진으로 막막했을 포항 지역 수험생들의 행운을 빈다.

한승주 문화부장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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