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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김지방] 어정쩡해도 좋아



생각할수록 맘에 든다. 어정쩡해서 더 그렇다.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회 얘기다. 한 달에 걸친 숙의(熟議)의 결론은 어정쩡했다. 짓던 원전은 짓되 앞으로는 줄여가자. 탈핵인지 찬핵인지 헷갈린다. 타협이다. 횃불처럼 화끈하지도, 사이다처럼 시원하지도 않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면 반대쪽에선 비난을 듣더라도 열렬한 찬양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타협했다고 하면 어디서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좌우 양쪽 끝의 확신자들만 비난을 쏟아내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타협을 하려면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영화 ‘남한산성’을 보라. 임금과 신하가 남한산성까지 쫓겨가 패전을 앞두고도 싸우자는 이들만 목소리를 높였다. 타협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대화를 하는 데서 시작한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소련에 핵무기 감축 협상을 제안하며 이렇게 말했다. “다시 시작합시다. 양 진영 모두 기억할 것은 정중함이 나약함의 표시가 아니며 진심은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두려워 협상하지는 맙시다. 그러나 협상을 두려워하지도 맙시다.” 대화는 상대방을 상대로 인정해야 가능하다. 전쟁광 미치광이 빨갱이 꼴통보수 한남 맘충 일베충이라고 딱지를 붙여서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저 녀석들과 대화한다는 건 미친 짓”이라고만 할 게 아니라, 저쪽도 사람이며 문명인인데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야 대화가 가능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100여년 만에 흑인정권이 들어섰을 때 백인 범죄자를 응징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데스먼드 투투 성공회 대주교는 백인의 얘기를 들어보자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범죄자들을 괴물과 악마로 단정하고 포기해버리면 자연히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게 됩니다. 그들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도덕적 존재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모두 버렸다는 뜻이 됩니다. 그들은 참으로 끔찍한 일을 저질렀음에도 여전히 회개하고 달라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꼭 500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붙인 95개조의 반박문도 사실은 어정쩡한 타협이었다. 면죄부는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교황의 권위와 가톨릭 교회 제도, 연옥마저도 어느 정도 인정했다.

루터는 오히려 가톨릭과 타협하고 싶어했다. 성경의 진리만 지킬 수 있다면 그 밖의 것은 포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의 반박문은 숙의와 공론화의 시작이었다. 루터는 “성경을 읽자”고 주장했다. 누구든 성경을 읽고 무엇이 옳은지 대화해보자고 제안했다.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해 활자판을 찍어 보급했다. 가톨릭 교회에 염증을 느꼈던 성주와 농민과 상공인들이 루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성경을 읽고 토론했다. 타협을 거부한 가톨릭은 개혁의 대상이 됐다.

한국사회에서 대화와 타협에 능한 집단이 어디 있겠냐만, 애석하게도 교회 역시 대화에 서투르다. “종교인 과세는 교회를 멸절시키려는 음모다.” “동성애 합법화가 한국사회를 무너뜨린다.” 이런 주장이 교회 안에서 널리 퍼지고 있다.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를 통해 옮겨지는데, 카톡창에선 묘하게도 한쪽의 목소리만 클 뿐 대화가 없다. 교회가 주장하는 내용을 조금이라도 의심하면 안 된다. 반대자는 교회와 사회를 파괴하는 악의 화신으로 묘사될 뿐이다. 어정쩡한 목소리가 나올 틈을 주지 않는다.

물론 “천국과 지옥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공론위를 만들어 결론을 내릴 사안이 아니지만, “예수를 왜 믿어야 하나” 같은 질문이 나오면 교회도 한 명의 시민참여위원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교회 안의 어정쩡한 목소리도 경청해야 교회 밖 시민과도 대화할 수 있다. 지금 한국교회는 과학과 문명을 지닌 현대인과 마주 앉을 준비가 돼 있는가. 무엇을 타협하고 무엇을 지켜야 할지 구분할 실력은 있는가. 공론위가 한국교회에 던지는 질문이다.

김지방 사회부 차장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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