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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고세욱] 대박이 아빠의 마지막 여정



27일에 모처럼 쉬면서 채널을 돌리다 KBS ‘해피선데이-슈퍼맨이 돌아왔다’를 봤다. 축구선수 이동국이 국가대표 트레이닝센터에 입소하는 날 5남매가 배웅하는 장면이 나왔다. 아이들은 아빠를 위해 아침에 영양가 많은 콩밥을 준비했다. 힘내라며 젤리가 담긴 통을 아빠 차 안에 몰래 넣어뒀다. 막내 대박이는 아빠가 골을 넣을 경우 약속한 세리머니를 선보여 웃음을 자아냈다.

솔직히 축구보다는 야구를 즐겨 보는 편이어서 특별히 인상 깊은 한국 축구선수를 꼽기가 쉽지 않다. 유럽에서의 활약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박지성, 손흥민 정도랄까. 이동국은 다른 면으로 기억되는 선수다. 개인적으로 이동국 하면 연민, 안쓰러움부터 느껴진다. 아마 축구, 아니 전 종목 선수를 통틀어 이동국만큼 영욕의 세월을 보낸 이가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지난 14일 발표된 2018 러시아월드컵 예선에 나설 대표팀 명단에서 이동국의 이름이 나오자 기분이 묘했던 이유다.

이동국을 처음 본 것은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였다. 첫 경기 멕시코전에서 패한 터라 16강 진출을 위해 다음 경기 네덜란드전의 중요성은 더욱 컸다. 결과는 0대 5 참패. 욕을 하며 봤지만 유일하게 눈에 띈 선수가 막내 이동국이었다. 살짝 골대를 벗어났으나 19세의 나이에 상대 수비수를 제치고 쏜 강력한 슛은 지금도 생생하다.

월드컵에서의 참패에도 이동국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의 말을 빌리면 “프랑스로 출발할 때 3명의 남성 서포터스만이 나왔는데 돌아와보니 수많은 여성 팬들이 공항에 있었다.” 4년 후 한국에서 열릴 월드컵의 주인공을 예약한 듯 싶었다.

역설적이게도 한일월드컵부터 이동국의 흑역사가 시작된다. ‘게으른 공격수’로 불리며 따 놓은 당상이라던 대표팀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월드컵 직후 열린 2002 부산아시안게임에 다시 호출됐다. 병역면제 혜택을 받을 마지막 기회였지만 4강전에서 이란에 승부차기 끝에 패했다. 당시 경제부 기자로 과천청사에서 이 경기를 지켜보다 그라운드에서 망연자실해하던 그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노력 없이 골만 주워 먹는다’는 평으로 4년 전과 정반대의 엄청난 안티팬이 생겼다. 부산아시안게임 4강전 승부차기에서 실축한 이영표의 슛은 ‘이동국 군대가라 슛’으로 불렸다. 아시안게임 직후 소속팀으로 돌아가 대전에서 리그 원정 경기를 치를 때 관중석에 한 플래카드가 붙었다. ‘개동국 당신의 군입대를 축하합니다.’

제대 후 절치부심한 끝에 한국의 대표 공격수로 자리잡았고 2006 독일월드컵 출전이 눈앞에 왔다. 하지만 월드컵 개막 전 무릎 부상으로 대표팀 승선에 또 실패했다. 12년 만에 참가한 2010년 남아공월드컵 16강전에서는 상대 골키퍼와의 1대 1 기회를 놓쳐 ‘국민 역적’이 됐다.

2010년 이후 이동국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일로 바쁘기도 했지만 나이로 보나 그의 선수 경력은 내리막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작용한 듯하다. 지난해 말 스포츠부서에 오고 나서 이동국이 전북에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음을 알게 됐다. 2000년대 온갖 부침을 겪은 그가 여전히 경쟁력을 갖추고 새파란 후배들에게 밀리지 않다는 점에 놀라웠다.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국가대표팀에 뽑혔다. 안티팬들조차 이제 오뚝이처럼 재기한 이동국의 투혼에 박수를 친다. 많은 이들은 이동국이 이틀 후 이란전에서 아들과 약속한 골 세리머니를 하게 되길 바랄 것이다. 하지만 이동국의 축구 인생을 생각하면 골을 넣지 못하더라도 후배들을 독려하며 뛰는 모습이 뭉클하게 다가올 것 같다. 이동국은 자서전 ‘세상 그 어떤 것도 나를 흔들 수 없다’에서 “남은 시간 그라운드에서 벅찬 감동과 희망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현역 이후에는 한국 축구의 작은 밀알이고 싶다”고 썼다. 온갖 좌절을 딛고 팬들의 비난에도 자기 역할에 충실하며 절차탁마해온 노장의 발걸음에서 밀알은 그라운드에 이미 뿌려져 있는지도 모른다.

고세욱 스포츠레저부장 swk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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