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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배병우] 북핵, 판이 바뀌다



역사에는 기존과 크게 다른 상황이나 방향으로 바뀌는 분기점이나 전환점이 있다. 그런데 전환을 촉발한 사건의 중대성을 그 시대 사람들이 바로 인식하는 경우는 드물다. 사건이 발생하고 한참 뒤에야 갈림길을 깨닫는 경우가 많다.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2371호 통과에 반발한 김정은의 탄도미사일 괌 포위 발사 위협, 이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화염과 분노’ 발언으로 촉발된 위기는 일단락됐다는 게 일반적 인식이다. 하지만 김정은의 위협이 미국과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들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이번 위기는 과거와 궤를 달리한다. 1990년대부터 본격화한 북한 핵 개발과 대응의 역사에서 2017년 8월은 거대한 분기점으로 평가될 것이다. 북한 전문가인 서울대 경제학부 김병연 교수는 “구조적 변화(structural break)가 일어났다”고 진단한다. 기존의 추세선에서 이탈한 새로운 흐름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번 위기가 차원이 다르게 된 배경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북한이 핵탄두 소형화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에 근접한 것으로 확인됐다. 다음은 미국이 이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음을 공식화했다는 점이다. 트럼프의 과도한 말 폭탄 논란으로 흐려진 측면이 있지만 핵심은 이렇다. 북한 핵이 완성 단계에 도달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이제 미국도 북한에 대한 모든 옵션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미국의 초조함이 이번 사태 내내 드러났다.

말 전쟁을 치른 북한과 미국이 이제 협상 테이블에 앉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북·미 간 비밀 접촉이 시작됐다는 보도도 있다. 하지만 현재의 게임 판에서는 북한이 진지하게 협상에 나올 유인이 적고, 테이블에 앉더라도 언제라도 박차고 나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 고도화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조금만 더 가면 한·미동맹 파기와 주한미군 철수까지도 요구하는 숙원의 빅딜을 미국과 당당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김정은이 성인이거나 바보가 아닌 이상 지금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특히 군 당국은 북한이 ‘2차 보복 능력’까지 갖춰 미국이 군사적 위협마저 카드로 쓸 수 없게 되는 사태를 우려한다. 2차 보복 능력이란 상대국의 핵공격을 받은 뒤 핵무기로 반격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상대방이 핵으로 선제공격을 한다 해도 핵무기로 반격할 수 있는 시설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다면 상대방이 공격 후 보복이 두려워 선제공격을 하기 어렵다. 미국은 그 시기를 이르면 1∼2년 후 정도로 본다. 그때는 협상 테이블에 나온 북한이 부르는 대로 값을 쳐줘야 할 것이다.

이처럼 게임의 판이 통째로 바뀌고 있는데도 문재인정부의 시각은 2000년대 초 김정일 시대의 추억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대화를 해야 하지만 북한이 대화할 의사가 없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그 배경은 ‘장마당’ 활성화 등 김정은 집권 후 시작된 ‘핵·경제 병진 노선’으로 북한 경제 사정이 한국의 물질적 지원에 목맬 만큼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북한이 2차 보복 능력까지 갖출 경우 미국이 한국과 일본의 핵 무장을 허용할 것을 우려하는 중국은 더 이상의 북핵 진전을 막아야 할 동기가 있다. 미국의 경제 보복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안보리 대북제재 2371호는 북한산 석탄, 철, 철광석 등 광물과 수산물 수입을 아예 금지토록 한 만큼 중국이 빠져나갈 여지가 크게 줄었다.

대화의 문을 열어둬야 하지만 장래 협상에서 북한이 두려워할 우리만의 카드는 무엇인지 자문해야 한다. 그 카드는 대북 제재의 실효성을 높이는 것이다. 핵·미사일 총력전의 대가가 만만치 않음을 북한 지도부의 피부에 와 닿게 해야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대화하기 위해 제재해야 한다는 말이 현 시점에서는 역설이 아니다.

배병우 편집국 부국장 bwb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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