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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준 칼럼] “트럼프의 위협, 김정은에겐 선물”



지난주 외신의 주요 뉴스는 미국과 북한의 ‘말싸움’이었다. 미국 대통령 입에서 “화염”이란 말이 나왔고 북한은 “포위사격”을 꺼내 들었다. 말의 전쟁이 이어지자 영국 BBC는 독자를 위한 퀴즈까지 고안했다. ‘이 말은 트럼프와 김정은 중 누가 했을까’ 맞혀보라며 발언 8건을 제시했다. 뉴스를 꼼꼼히 읽지 않았다면 헷갈릴 만큼 둘의 말은 비슷하게 사나웠다.

그렇게 쏟아져 나온 외신 기사 중 눈에 띄는 문장은 이것이었다. ‘김정은은 트럼프의 공개적인 위협을 선물로 여길 것이다.’ 북한은 혹독한 경제난을 고난의 행군으로 버티며 핵 개발을 이어왔다. 수많은 사람이 굶주리는데 3대에 걸쳐 핵무기를 만드는 일은 주민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다. 아무리 철권통치를 한데도 이런 고난을 감내케 하려면 왜 그래야 하는지 납득할 만한 논리가 필요한 법이다.

북한 정권이 찾아낸 건 ‘미국의 적대시(敵對視)’였다. 북한은 6·25 전쟁을 북침이라 우기며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선전해 왔다. “미국은 이미 한 번 침략해왔던 나라이고, 주한미군 2만8000명을 코앞에 둔 채 해마다 크고 작은 군사훈련을 하고 있어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살려면 핵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로 주민들이 먹고살 자원을 핵 개발에 쏟아 부을 수 있었다.

이런 북한을 향해 “화염과 분노”에 직면할 거라 공언한 미국 대통령 발언은 김정은의 내부 선전 논리를 실증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선물이라는 게 외신의 분석이었다. 북한 매체들은 “거봐라. 쟤들이 쳐들어온다지 않느냐” 하는 투로 미국에서 나오는 선제타격론과 군사옵션 발언을 주민들에게 속속 알리고 있다.

김정은 정권의 행태를 보고 있자면 화가 치민다. ‘핵·경제병진노선’이란 구호부터 그렇다. 결국 먹고살 경제를 위한 일이란 건데, 핵을 갖고 그것을 얻으려 한다. 정당한 경쟁을 통해선 안 될 것 같으니 남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해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발상은 조폭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

더 화가 나는 건 괘씸한 행태를 응징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서다. 선제타격이든 뭐든 해서 정권을 도려내면 좋겠지만 우리가 감수할 위험이 너무 크다.

김정은은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 10년간의 대화, 10년간의 압박에도 핵 개발을 중단하지 않았다. 섣불리 사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살려고 만든 것인데 죽을 게 뻔한 길을 서둘러 택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계속 벼랑 끝을 걸으려 할 텐데, 그러자면 북한 주민들이 이 노선에 계속 동의해줘야 한다. 이를 위해 “저들의 위협 탓에 핵이 있어야 우리가 살 수 있다”는 논리를 더 견고하고 더 치열하게 선전할 것이다.

지난해 귀순한 태영호 전 주영 북한공사는 “북한 주민은 천성적으로 저항기질이 강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최근 한 포럼에서 “김정은은 이미 북한 주민들에게 쓰라리게 패배한 경험이 있다”며 2009년 화폐개혁을 언급했다. 김정은이 후계자로 임명돼 단행한 화폐개혁은 주민들의 전국적인 저항에 부닥쳐 한 달 만에 박남기 노동당 재정부장의 처형으로 막을 내렸다. 북한 주민이 정권에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북한 정권은 20년 전 작은 ‘메뚜기장’으로 시작한 장마당이 전국 400여 곳에 뿌리 내리는 걸 막지 못했다. 통치자 우상화에 열을 올리는 것은 그렇게 공을 들여야만 주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 국무·국방장관이 14일 언론 기고문을 통해 대북 협상 의사를 밝혔다. 북한 매체가 과연 이를 보도할까? 주민들을 설득해온 논리에 균열이 생길까 우려해 아마 침묵할 것이다.

김정은의 핵 게임에는 중요한 플레이어로 북한 주민들이 끼어 있다. 정권을 상대로 대화와 압박이 다 통하지 않는다면 주민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유일하게 남은 카드일지 모른다. 태 전 공사는 “북한 정권을 무너뜨릴 힘은 북한 민중에게만 있다”고 했다.

태원준 온라인뉴스부장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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