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찬 심진경의 명작은 시대다] 소시민, 천박하거나 가련한



이호철의 ‘소시민’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였던 부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사진은 부산의 1세대 사진작가 임응식(1912∼2001)과 정인성(1911∼1996)이 1940년대 말부터
50년대 말까지 부산을 촬영한 작품들이다. 51년 영도의 판자촌 모습이다.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51년 서면에서 촬영된 한 부녀의 모습.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49년·59년 충무동의 모습이 담겨 있다.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소시민(小市民)은 누구인가? 이호철에 따르면 그들은 정치에 무관심하고 경제적 이익에만 몰두하는 속물이다. 이호철의 소설 '소시민'에서 소시민은 '타락'이라는 단어를 동반하면서 등장한다. "이 무렵의 부산 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해먹던 사람이건 이곳으로 밀려들면 어느새 소시민으로 타락해져 있게 마련이다."
 
'소시민'은 전시의 피난지 부산 완월동 제면소에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소설에서 그들 모두는 이념 계급 노선 성별 등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소시민'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이 소설의 배경인 한국전쟁과 피난지 부산은 작가가 소시민으로 요약되는 전후 한국인의 정체성의 기원을 탐색하기 위해 선택한 시간과 장소이다. 6·25전란은 한국의 강토를 황폐화시키고 있었고 한국인들은 그날그날의 삶을 가까스로 이어가고 있었다. 와중에도 피난지였던 부산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전쟁의 영향에서 벗어난 공간이었다. 분명 전방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소설에서 전쟁은 사망 통지서나 징집영장 혹은 소문의 형태로만 전해진다. 오히려 당시 미국의 전쟁 물자가 들어오는 관문이었던 부산은 이상한 활력으로 생기 넘치는 일상적 공간으로 그려진다. 소설에서 그곳은 전쟁의 공포보다는 생활과 생존이 더 강조되는 일상의 무대로 등장한다.
 
이러한 전시 부산의 일상은 아이러니한 생활 감각을 만들어낸다. 급박한 생활논리가 전쟁을 비롯한 사회정치적 현실에 대한 판단을 둔탁하게 만든 반면 거꾸로 생존에 대한 감각만 비상하게 발달한 기이한 속물적 존재를 만들어낸 것이다. 당시의 부산은 전시였음에도 퇴폐풍조가 만연해 카바레 요정 다방 등이 급속하게 생겨났고 불법 밀수도 번성했다. 그렇게 전쟁 특수로 폭발적으로 팽창하던 전시 부산의 풍경은 급격한 근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돈과 성에 대한 속물적 욕망이 들끓어 오르던 1960년대 중반 한국사회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소설에서 그런 부산의 축도로 선택된 장소가 바로 완월동 제면소다. 소설은 바로 그 완월동 제면소에 화자인 ‘나’가 취직하는 것으로 시작해 군에 입대하면서 끝난다. 그 시간이 대략 1951년 봄에서 1952년 6월까지다. 그곳에서 ‘나’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겪었던 여러 일들, 삶과 죽음, 전락과 상승, 성공과 실패가 교차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 그것이 ‘소시민’의 내용이다. 
 
완월동 제면소에서 ‘나’가 만난 사람들은 누구인가. 농촌의 순박함을 간직한 천안색시, 조직 노동자의 경력을 가진 정씨와 김씨, 시골 소지주의 외아들인 곽씨, 식민지 경험을 유일한 삶의 지표로 삼는 신씨, 식민지 시기 좌익에 가담했던 인텔리 강 영감, 그리고 전쟁 특수로 한몫 잡은 제면소 주인댁이 그들이다. 이렇듯 다양한 인물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살았던 삶의 역사에서 튕겨져 나와 부산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시공간으로 편입되면서 “소시민”이라는 평균적 존재로 변모한다. 사변통에 가능한 삶은 “이슬같이 죽든가, 우연하게 살아남든가 두 길”뿐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때 살아남는다는 것은 “별의 별 쌍놈의 짓 다 해서라도 돈만 벌면 양반도 되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낯가죽이 두터워지는 과정”이다. 김씨는 바로 그런 낯가죽 두꺼운 쌍놈 중의 하나다. 그는 “생활력의 화신”으로서, 정씨와 함께 해방공간에서 좌익운동가로 활동했지만 지금은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속물적인 자본가로 성장한다. 그런 그는 심지어 이승만 정권의 앞잡이 노릇도 마다하지 않는다. 천안색시는 김씨의 꼬드김으로 제면소 식모 일을 그만두고 “빠아”에 취직해 새로운 속물적 세계의 질서를 밑바닥에서부터 배워 결국에는 양장점 주인이 된다. 반면 끝내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못한 정씨, 그리고 인텔리였지만 보련(보도연맹)에 가입했던 경력을 떨쳐버리지 못한 강 영감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쪽인가? ‘나’는 김씨의 생활력과 정씨의 정신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나’는 정력적으로 현실에 적응해가는 김씨의 생활력에 매혹되면서도 그의 천박함은 혐오한다. 반면 정씨의 무능하고 초라한 모습에 실망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단단한 중심에 매혹되기도 한다. ‘나’는 결국 이 세계가 순박함의 세계에서 경솔함과 부박함의 세계로 이동할 것임을 직감한다. 그리하여 ‘나’ 또한 결국에는 “그들과 오십보백보의 어슷비슷한 거리를 두고 살아”갈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여전히 두 세계 사이를 오락가락할 뿐, 어느 한 세계도 쉽게 승인하지 못한다. 이호철의 ‘소시민’의 세계는 간단한 도식으로 나누어지는 명쾌한 세계가 아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소시민”에 대한 해석이 생각만큼 그렇게 간단치 않은 문제임을 암시한다. ‘나’와 정씨의 다음 대화를 들어보자. “정씨도 이젠 아주아주 소시민이 되어버렸군요. 가장 경멸하고 얕보던 그 소시민이. 하긴 소시민이란 쓰레기 같은 갖은 잡동사니를, 좋고 나쁜 인간성이란 인간성은 다 가지고 있는 것이겠지만.” “하긴 그렇기도 하겠군. 소시민이란 살기 편할 때는 소시민이지만, 불편할 때는 엄살꾸러기가 되고, 이판사판인 마당에선 미친 깡패가 되거든. 위에 붙거나 아래에 붙거나 그렇게 붙어서 돌아가게 마련이지.” 이 대화에서 “소시민”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뒤섞인 하이브리드적인 어떤 것, 혹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신이 가능한 카멜레온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끝없이 움직이는, 단일한 정체성으로 수렴되기 어려운, 그래서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어떤 것. 그것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복잡하기는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나’가 성적 관계를 맺는 세 명의 여자들도 한 마디로 판단할 수 없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성적으로 무능한 남편의 대용으로 여러 남자들과 잠자리를 갖는 뻔뻔한 ‘주인마누라’, 고3 나이에도 이미 남자 경험이 많은 강 영감의 딸 ‘매리’, 유부녀지만 김씨의 유혹에 넘어가 결국에는 남편을 잃고 “빠아”의 여급으로 전락한 ‘천안색시’. 이 세 명의 여자들은 전쟁기의 타락상을 대변하는 인물들인가? 그러나 소설에서 ‘나’의 판단은 단순하지 않다. 오히려 ‘나’는 ‘주인마누라’의 뒤틀린 성적 난무(亂舞)에서 속물적 욕망 이면에 드리워진 우울증과 염세증, 무기력을 목격하고, ‘매리’의 상식을 벗어난 행동에서는 쾌감과 자유를 느끼기도 한다. 게다가 십 오년 후에 다시 만난 ‘천안색시’의 깊이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나’가 발견하는 것은 천박함이 아닌 “관록과 두터움”이다. 물론 ‘소시민’의 여성인물들이 가부장제적 남성의 시선에 포착된 존재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한국소설에서 익숙한 정형화된 여성이미지(예컨대 몸을 버리면 창녀가 되는 식)를 슬쩍 비껴가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호철은 “인간의 삶이란 이론이나 이념으로 다 재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도 도식적이거나 일방적이지 않다. 물론 생존 그 자체만을 생의 목적으로 설정하고 다른 모든 가치나 미덕을 저버리는 소시민적 헝그리 정신을 바람직한 것으로 수긍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전쟁을 겪으며 사회구조가 전면적으로 해체되는 시기에 소시민화란 피하기 어려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새로운 운명을 향해 돌진하거나 옛것과 새것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들에 대해 “소시민적”이라고 싸잡아 비판하면서도 그들이 지닌 나름의 긍정적인 면모에 눈을 감지 않는다.
 
문제는 변화를 거부하고 기존의 관념에 붙들려 있는 존재다. 예컨대 시대착오적인 봉건지주의 모습을 고수하는 곽씨, 현재의 사정에는 까마득한 백치이면서도 왜정말기의 일본군을 “절대절명의 신화”로 생각하는 신씨가 그렇다. 이들을 보면서 ‘나’는 “명료하고 분명한 것으로 이미 처리되어 있던 것이 아직 우리의 주변에는 끈덕지게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한다. 특히 소설의 결말에서 ‘나’는 신씨를 다시 만나는데, 그는 거의 변하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제국 일본의 식민지 조선 지배가 결코 지나가버린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사태임을 은연중 암시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이 연재되던 1964년에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런 와중에 이호철은 신씨의 모습을 통해 “이미 죽은” 존재들이 한국사회에서 죽은 듯 죽지 않고 좀비처럼 잔존해 있음을 고발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니 이 불사(不死)의 존재들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적폐가 아니겠는가? 때로는 비극적 몰락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 혹은 그악스러운 생활력이 건강할 수도 있다. 비록 소시민적일망정 그들은 적어도 우리 사회의 변화에 그 나름의 방식으로 반응해왔다. 그런 점에서 “소시민”은 1960년대 한국사회의 전면적 변화를 반영하는, 문학사에서 전례 없던 새로운 등장인물이 될 수 있었다.
 
<문학평론가 심진경>
 

■이호철은 현실 사회의 변화를 위해 적극 활동한 실천적 작가
 
이호철(1932∼2016)은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인민군으로 징집된 후 국군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그 후 단신으로 월남하여 부산에서 부두 노동자, 제면소 조수, 미군 부대 경비원 등을 전전하며 주경야독으로 소설습작을 했는데, '소시민'은 이 시절 제면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성격의 소설이다. 실향민으로서 남한에서 살아남아야하는 치열한 생존 의식과 그에 반비례한 척박한 현실은 그의 소설의 원체험으로 자리하게 된다. 그는 1955년 단편 소설 '탈향'으로 등단(황순원 선생 추천)하여 본격적인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뒤, 비교적 초창기에 쓴 '판문점'(1961)과 '닳아지는 살들'(1962)로 각각 현대문학상과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소시민' '남풍북풍' '재미있는 세상' '남녘사람 북녘사람' 등의 장편소설을 써서 한국 문단문학의 대표작가가 됐다. 그는 1971년부터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하는 등, 현실 사회의 변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 실천적 작가였다. 특히 2004년에는 분단 조국의 현실을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한 공로를 인정받아 독일 예나대학에서 '프리드리히 실러 공로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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