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유형진] 가슴에 묻은 아이들



우리 집안엔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가 몇 있다. 25년 전에 큰집 큰언니의 다섯 살 된 큰아이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 아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우리 집안에선 금기였다. 누구의 어떠한 말로도 언니와 형부를 위로해줄 수 없었다. 그들을 위로해줄 자격이 되는 사람은 둘째 큰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에 다른 자식이 있었는데 홍역으로 그 아이를 잃은 우리 할머니, 그리고 열아홉 살 아들을 오토바이 사고로 잃었던 서울 당고모뿐이다. 그 외의 가족들은 그저 기대고 싶을 때 안아주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손만 잡아줄 수 있었을 뿐. 사촌언니의, 당고모님의, 그리고 할머니의 가슴에 진 옹이의 깊은 슬픔을, 솔직히 내 자식이 생기기 전까지 나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자식이 있다 해도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슬픔은 함부로 위로하는 것 자체가 무례한 짓일 수 있다. 그럴 때 곁에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슬픔을 존중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세월호 유가족들의 슬픔은 말해 무엇할까. 어느새 3주기가 되었다. 슬퍼야 할 때 제대로 슬퍼할 수 없었던 분들이다. 제대로 된 사고의 원인을 밝혀내야 했었고, 유가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무리들 때문에 숨죽여 울어야만 했던 분들이다.
 
충분히 존중받은 슬픔은, 스르르 사라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슬픔은 울분이 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짙고 깊어지는 것이다. 큰집 큰언니의 아이가 살아 있다면 올해 서른이 되었을 것이다. 언니는 매해 그 아이의 생일이면 아프고, 기일이면 더욱 아플 것이다. 그러나 티를 내지 않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살아야 하므로. 그 후 언니는 신앙이 깊어졌고, 형부도 독실한 크리스천이 되어 있다. 살아 있는 자들은 역시, 살아야 하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사촌자매올케모임에 참석하여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만나 언니와 헤어질 때는 꼭 안아주고 오는 일뿐이다. 그마저도 자주 빠져서 죄송할 뿐. 하지만 우리 언니는 그것만으로도 큰 위안 받고 있을 것이라고,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한다. 내 마음 편하자고.
 
유형진(시인), 그래픽=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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