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우리의 고통 대신 져 줄 후보는 없다

매년 4월 첫 토요일엔 집안행사가 있다. 원래는 부모님 추도모임인데 해를 더할수록 흩어졌던 형제들이 함께하는 축제의 시간이 됐다. 특히 올해는 아버님 탄생 100주년과 어머님 별세 20주년을 맞아 부모님의 존재감을 각별하게 새겨봤다.

이날 함께 나눈 얘깃거리는 얼마 전 개봉작 ‘사일런스’. 일본의 엔도 슈사쿠(1923∼96)가 66년 발표한 소설 ‘침묵’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영화화한 것이다. 400여년 전 규슈에서 벌어진 기독교(가톨릭) 신자들과 예수회신부들의 순교와 배교(背敎)에 대한 얘기다.

1549년 시작된 일본의 천주교 포교는 17세기로 넘어오면서 금교령(禁敎令)으로 좌절된다. 이에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박해를 겪었다. 막부는 신자들에게 배교를 강요하면서 예수의 성화(聖畵)를 공개적으로 밟도록 했다. 바로 후미에(踏繪)다. 밟으면 살려주고 밟기를 주저하면 고문과 죽음으로 내몰았다. 특히 막부는 신부의 배교가 갖는 상징성을 노리고 집요하리만큼 신부들의 배교에 매달렸다.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에게도 회유와 압박이 거듭된다. 막부는 로드리고가 후미에를 안 하면 후미에를 한 신도들조차 살려주지 않겠다고 윽박지른다. 마침내 배교를 결심한 그는 하늘을 향해 “침묵만 하고 있던 당신을 원망한다”며 절규한다. 바로 응답이 들려온다. “난 침묵하고 있던 게 아니다. 너희와 함께 고통 받고 있었단다.” 이 대목이 ‘침묵’의 백미라고 하겠다.
 
누군가가 함께해 주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그것을 고백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신앙의 영역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감은 흔히 그렇게 확인되는 법이다. 그날 추도모임 때, 부모 마음도 그와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을 함께 나눴다. 부모가 늘 직접 함께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으로는 언제나 통할 수 있었을 테니.
 
우리는 때로 외롭고 불안하다. 누가 나와 함께해 줄 수 있을지 가늠하다가 더 위축되기도 하며 거꾸로 자신감과 새 힘을 얻기도 한다. 세월호 이후 지난 3년 동안 우리 사회는 아무도 우리와 함께해 주지 않는다는 점에 오열했다. 눈물은 아직 멈추지 않았지만 지난겨울 광장을 겪으면서 함께하는 이들이 있음을 우리는 똑똑히 확인했다.
 
그리고 맞이한 대선 정국, 다시 우리는 선택에 내몰렸다. 물론 ‘후미에’는 아니다. 어떻든 누가 적임자인지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분별할 수 있는 판단 재료는 널렸다. 하지만 본질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우리와 함께해 줄 수 있겠느냐 여부가 바로 그 기준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선택할 후보에 대한 지나친 기대다. 누군가를 뽑아놓으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늘리고, 밀려났던 동아시아 외교 현장에서 나라의 위상을 세우고, 경색된 남북관계를 말끔하게 풀어내리라는 기대는 잘못됐다. 그건 그저 환상일 뿐이다.
 
환상은 종종 비극을 낳는다. 한국 정치가 그래왔다. 군사독재 시절은 물론 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시작은 늘 장밋빛 구호로 내달렸지만 종국엔 그 허울 좋은 공약 탓에 휘청거린 세월이 벌써 30년이다. 우리는 좀 더 냉정해져야 한다.
 
누구를 대신해 고통을 감내하는 일은 지고의 경지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이사야 53:5) 고난주간의 의미를 상징하는 고백이자 위로하는 구절이다.
 
그것은 부모의 마음이라면 혹 모를까 후보들의 공약으로는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영역이 결코 아니다. 섣부른 기대보다 냉철함이 간절한 이유다. 고통을 대신 져 주지는 못해도 아픔에 함께하고 공감해 줄 수 있는 후보를 꼭 찾아내야겠다.
 

조용래 편집인 jubilee@kim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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