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유형진] 봄날은 간다





4월이다. 곳곳에 꽃소식도 들리곤 하지만, 북쪽에 위치한 우리 동네엔 아직 한 송이 꽃도 피지 않았다. 봄이라는데 봄 같지 않은 뉴스들이 넘쳐나고, 내가 아는 이들은 하나같이 다들 지쳐 있다. 봄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가버린 기분. 하늘은 미세먼지로 뿌옇고. 4월은 잔인한 달이다.
 
어릴 때 살던 동네에는 거의 모든 집 앞에 작은 텃밭이 있었다. 그 텃밭들엔 상추, 깻잎, 쑥갓, 풋고추와 오이, 가지. 그때그때 먹을 반찬으로 만들 푸성귀들을 키우곤 했다. 겨울이면 그 텃밭 옆에 연탄재를 쌓아 내놓던 집도 있었고. 아이들은 연탄재를 굴려 눈밭이 된 그 텃밭 위에 눈사람을 만들어놓았다. 아이들이 만든 눈사람이 겨울 내내 잘 지내다가 정월대보름을 기점으로 점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녹았다. 그렇게 3월 개학 무렵이면 언제 그 밭이 눈밭이었는지 알 수 없도록 꽃다지, 쑥, 냉이, 명아주 새싹 등의 풀들이 돋아나 있었다. 가끔 눈사람의 뼈였던 살구색 연탄재가 부서진 곳에 냉이가 자라났는데. 나는 그것이 꼭 멍 자국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풀리면 동네 가운데에 있던 우물가엔 여자들이 나와 빨래를 하곤 했는데. 기하학적인 무늬가 촘촘한 월남치마를 걷어붙이고 앉아 빨래를 하던 어떤 아주머니 허벅지에 있던 파랗고 깊은 멍 자국이 어린 내 눈에 보였다. 들판의 멍 자국 같은 냉이와 쑥을 캐느라 쪽 칼이나 호미를 들이밀곤 하던 봄. 눈을 들어 먼 동산을 바라보면 노란 산수유가 그늘을 만들어놓은 곳이 보였다.
 
온 국민의 깊은 멍 자국 같은, 바닷속에서 녹슬어가던 배가 인양되었다. 유해도 찾지 못한 미수습자 가족들의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릴 수 있을까. 표현할 말을 찾을수록 죄송한 마음뿐이다. 아직 찾지 못한 이들이 있고, 왜 그런 사고가 났는지 분명하게 밝혀진 것도 없다. 사고 당일 사고대책본부에 오후 늦게 나타나 엄한 소리만 하던 무책임한 대통령은 탄핵되어 구속되었지만. 아홉 명의 미수습자를 찾기 전까지 봄은 늘, 오지도 못한 채 가고 말 것이다.
 
유형진(시인), 그래픽=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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