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원응두 (3) 폭도들에 끌려가 죽을 뻔… 곡식·가축까지 모두 빼앗겨

원응두 장로가 제주 4·3공원에서 4·3사건 때 행방불명된 사촌 형 비석 옆에 팔을 기대앉아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


그야말로 해방은 새벽같이 왔다. 1945년 8월 15일. 내가 열한 살 되던 해였다. 마침내 대한민국이 일제의 35년간의 압박 속에서 벗어난 날이다. 그러나 해방을 맞았으나 그 기쁨의 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2년 뒤 4·3사건이라는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을 겪었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을까. 4·3사건은 아주 잔혹한 사건으로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설상가상으로 3년 후엔 6·25전쟁으로 인한 민족의 아픔들을 안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떻게 이 험한 세월을 지내 왔을까. 지금 와서 생각하니 이런 처참하고 힘들었던 상황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기독교 신앙 덕분이라는 것을 새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여섯 글자로 줄이면 ‘하나님의 섭리’라고 밖에 표현할 말이 없다.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이다. 이로 인해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이었다. 좌우의 이념 문제로 벌어진 민족의 비극적 사건이었다.

그때가 내 나이 15살이었다. 제주 전역은 물론 우리 마을 중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청년들이 중문파출소에 모였다. 집회를 열고 구호를 외치며 노래를 불렀다. 순경들과 미군들은 집회를 해산했다. 파출소 무기고를 습격하고 총과 실탄을 탈취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때 미군들이 쏜 총에 맞아 사람이 죽기도 했다. 갑자기 학교 선생님들이 잡혀가고 면장과 면사무소 직원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온 마을이 어수선했다.

그날 나는 죽는 줄로만 알았다. 어느 날 폭도들이 우리 집을 덮쳤다. 쌀독을 뒤지고 쌀독에 있는 곡식을 빼앗아 가고 기르던 가축까지 끌고 갔다. 그들은 겁에 떨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내 손을 잡고 끌어가려고 했다. 그때 나는 몸이 몹시 아픈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나를 조금 끌고 가다가 내가 기운이 없어 축 처져 있는 것을 보고는 그냥 내팽개쳐 놓은 채 달아났다. 데리고 가봐야 짐만 될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만약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분명 끌려갔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 당시 많은 사람이 폭도들에게 끌려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폭도들은 마을 어귀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총살했다.

길거리에는 경찰들과 군인들이 총을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밤에는 통행금지로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마을 역시 돌아다니기가 무서웠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다니지 못하도록 단속했다. 마을 사람들은 동네를 지킨다고 성담을 쌓고 보초를 세웠다. 어린 나도 방범소년단으로 대한청년회 사무실에 나갔고 밤에는 보초를 서기도 했다.

무섭고 두려웠다. 밤마다 총소리가 들렸다. 그때 우리 집이 몽땅 불타 없어져 동네에 허름한 집을 빌려 살았다. 우리 가족은 살아남은 것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정리=윤중식 종교기획위원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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