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원응두 (1) 제주 중문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70여년 신앙의 길

제주도 서귀포시 색달동 제주중문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비 앞에 선 원응두 장로.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끝이자 시작점이다. 내외국인을 망라해 많은 사람이 한 번쯤은 여행하고 싶어하는 곳이다. 눈을 감으면 푸른 바다와 부드러운 한라산, 탐스러운 귤이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맑고 깨끗한 공기와 노란 유채꽃과 빨간 동백꽃 등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이 나그네의 지친 마음을 치유해준다.

서귀포시 중문은 우뚝 솟은 한라산을 뒤로 한 정겨운 마을이다. 이곳은 관광단지가 있어 제주를 여행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하얀 눈이 덮인 한라산과 예쁜 동백꽃, 노란 유채꽃과 귤이 달린 과수원은 살아있는 캔버스다.

중문관광단지를 지나는 도로를 지나다 보면 제주중문교회라는 커다란 교회 간판이 보인다. 이 교회는 108년 세월의 긴 역사를 지닌 교회다. 이 교회가 내 믿음의 터전인 중문교회다. 나는 이 중문교회에서 70여 년의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다. 원로장로로 은퇴한 지 올해로 20년째다.

나는 1934년 10월 15일 제주의 중문이라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매우 빈곤했다. 그때는 너, 나 할 것 없이 그랬다. 특별히 제주는 더욱 가난했다. 하루 세끼 먹는 날이 드물었다. 부모님은 8남 1녀를 두었으나 일곱 명의 자식을 잃었다. 나는 일곱째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위의 형들과 누이가 왜 죽었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다. 옛날에는 아이들이 아파도 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약도 제대로 쓰지 못해서 어린아이들이 많이 죽었다. 아마 우리 형제들도 그런 것 같다. 9남매 중 나와 동생만이 살아남아 지금은 남동생 한 명만 형제로 생존해 있다. 사촌 형도 있었는데 4·3사건 때 행방불명됐고, 그 가족들은 모두 희생당했다.

이처럼 부모님은 자식을 잃을 아픔을 당하셨기에, 특별히 신경을 쓴 덕택에 어려서부터 나와 동생을 아끼시고 더욱 애지중지하게 키웠다. 부모님들은 늘 우리가 온유하고 성실, 근면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원했던 것 같다. 나는 일곱 살 때 동네에 있는 서당에 들어가 천자문을 배우고, 명심보감도 배웠다. 서당에 가는 것이 그렇게 즐거웠다.

여덟 살이 되던 해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라 부름)를 입학하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학교에 갔다. 학교에 가보니 교장 선생님은 일본 사람이었고, 선생님들도 절반 정도는 일본 사람들이었다. 그때는 일제 강점기라 학교나 관공서들을 거의 모두 일본 사람들이 장악했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면접을 했는데 그만 탈락하고 말았다. 일본말을 못 한다는 것이 탈락 이유였다. 그때 나는 학교에 입학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무척이나 실망했다. 빨리 학교에 들어가서 친구들과 함께 재미있게 놀고, 많은 것들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호기심 많고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지만 현실은 암담했다. 무척이나 학교에 갈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학교를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홉 살이 돼서야 일본말을 어느 정도 배우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드디어 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꿈만 같았다.

약력 △1934년 10월 15일생 △1955년 김춘년(90세) 권사와 결혼, 슬하에 원희룡 국토교통부장관 등 2남 4녀 △제주중문교회 원로장로 △제일농원 경영(유기농) △㈜정농회 회원 △국제기드온협회 서귀포 캠프 회장 역임

정리=윤중식 종교기획위원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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