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유이상 (3) “일하든 공부하든 하루라도 일찍 서울 갈래요” 독립선언

유이상(왼쪽) 대표의 딸 세인의 1992년 초등학교 졸업식 모습. 유 대표는 자신의 삶이 초등학생 시절 끝났을 수 있었을 시대상을 회고하며 지금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세 살 위 형과 땔감 나무 작업을 마치고 잠을 청하러 배수로에 들어갔지만, 순식간에 쏟아진 비가 배수로로 흘러들어오면서 우리는 물벼락을 맞은 꼴이 됐다. 잠에서 조금 늦게 깨어났거나 배수로에 조금만 더 빨리 물이 들어찼다면 내 삶의 기록은 12세 소년으로 끝이 났을 거다. 형과 나는 캄캄한 밤, 비에 홀딱 젖은 채 추위에 떨며 10㎞ 이상을 걸어와야 했다. 불빛 하나 없는 산길과 들길을 온몸이 젖은 채 십대 소년 둘이 걸어온 것이다. 그때 탈진해 쓰러지지 않은 것도, 저체온증으로 동사하지 않은 것도 돌아보면 주님의 은혜로 밖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고창읍 주곡리는 고흥 유(柳)씨 집성촌이라 마을에 두세 집을 빼곤 모두 유씨들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을 쉰 뒤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선생님들은 시험 성적 결과를 늘 벽에 붙여 학생들을 자극했다. 학년별로 전교 1등부터 10등까지 이름을 써 붙였고 우리 학년의 6~7명은 모두 유씨였다.

중학교에 갔다고 해서 공부에만 집중했던 건 아니다. 집에서는 늘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고, 시험 기간이라 해도 공부에만 매달릴 형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중학교에서는 공부를 제법 잘했다. 반에서는 늘 상위권을 유지했고 일등을 한 적도 있었다. 중학교 3학년은 금방 지나갔다. 집안 형편이 좋은 몇몇 친구들은 광주나 전주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타지로의 유학이라니.’ 우리 집안에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고민의 밤이 이어졌다.

“고창에서 고등학교만 다니고 대학을 못 갈 바에는 서울로 가겠습니다. 일하든 공부를 하든 일단 하루라도 빨리 갈게요.” 고창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라는 어머니에게 단호하게 말씀드렸다. 일찍 서울로 가서 내 길을 찾겠다는 독립 선언이었다. 부모님은 놀라며 난감해 하셨다. 열여섯 어린 아들이 그 멀고도 위험해 보이는 서울로 가겠다니 말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걱정이 앞서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내 결심엔 흔들림이 없었다. 이대로 살지 않겠다는 인생 최초의 선택이었고 더 넓은 세상으로 가야겠다는 포부를 펼친 첫 결단이었다.

1964년 12월 24일. 중학교 3학년 마지막 겨울방학을 하는 날,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와 함께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생애 처음 가는 서울길이었다. 어머니 손에는 혼자 살아갈 둘째 아들을 위해 어렵게 마련한 쌀 한 가마니 값 3000원이 들려 있었다.

새벽녘 서울역에 내리니 네온사인이 번쩍였다. 어머니는 나를 맡기기 위해 돈암동에 있는 이모집을 찾아갔다. 시내에서 들어가자면 아리랑고개를 넘기 전 왼쪽 산꼭대기에 있는 신항사 근처였는데, 시멘트 블록으로 벽을 세우고 루핑(섬유 소재에 아스팔트 코팅을 한 방수포)을 지붕으로 덮은 작고 초라한 산동네 집이었다. 작은 방 두 칸에 이모 부부와 딸 5명, 아들 1명 등 여덟 식구가 사는 좁은 집이었다. 이모님은 그렇게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나를 받아들인 것이다. 헤어지기 전 어머니는 3000원을 내 손에 쥐여주며 당부하셨다. 의외의 한 마디가 뇌리에 와 닿았다. “객지에서 사춘기를 보내야 할 텐데 부디 여자를 조심해라.”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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