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서정희 (3) 가슴에 멍울 만져져… “건강한 내가 암이라니” 기가 막혀

서정희 작 ‘천로역정’(天路歷程). 서씨는 천로역정 읽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아이 키울 때 천로역정을 그림으로 그려 쉽게 설명하곤 했다.


“엄마, 여기 좀 만져봐. 좀 이상하지?”

지난 3월 엄마와 함께 아침을 먹고 집 근처 사우나에 갔던 날이다. 사우나에 가길 좋아해 급한 일이 아니면 늘 빼먹지 않는다. 평소같이 비누칠을 하는데, 오른쪽 가슴 위에 돌덩이 같은 것이 만져졌다. 엄마 손을 잡아끌어 내 가슴 위에 댔다. 엄마는 깜짝 놀라며 당장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솔직히 말하면 병원 종합검진 비용이 아까워 3년 동안 검사를 받지 않은 터였다. 평소 목 주변이 쑤시고 어깨는 뻐근했고 등에 통증까지 있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열심히 글 쓰고 책 읽는 습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큰 병이 내 몸에서 자라고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대학병원 조직검사 결과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의사의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 당황스럽고 기가 막혔다. “주여, 건강한 내가 암이라니….”

암 초기 진단이었지만 의사는 가슴을 모두 절제하고 항암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후 모든 일이 폭풍처럼 지나갔다. 새로 계획한 일도 전부 멈춰 세웠다. 오직 병 치료에 집중해야 했다.

종양이 있던 오른쪽 가슴 절제 수술을 하면서 피 주머니를 차고 누우니, 차라리 죽으면 좋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기구할까….’

하나님께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투정 부릴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수없이 경고가 있었다. 몸 구석구석 통증을 무시했던 건 나였다. 그걸 그냥 지나친 게 잘못이었다.

아프기 전과 후, 딴사람이 됐다. 예민한 감수성은 빛을 잃었고, 피부와 손톱은 검어지고 머리카락도 숭덩숭덩 빠졌다. 건강을 잃고 초라해진 나 자신이 서글펐다.

걷는 것쯤은 당연한 일인 줄 알고 살았는데, 잘 걷지 못하니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었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드려야 하는데…. 제대로 앉을 수 없으니 기도하는 것도 버거웠다. 피 주머니를 차고앉아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원하는 건 큰 게 아니었다. 작지만 빛나고 아름다운, 사소해서 편안하고 다정한 것, 혼자 일어나 새벽기도를 하고, 두 다리로 걸어 주일에 교회 가는 것,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가족과 식사와 산책을 하고, 별일 아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함께 웃고 우는 것, 바로 그런 것들이 하고 싶었다.

일상을 채웠던 작고 아름다운 시간이 그리웠다. 고열과 씨름하고 수많은 부작용과 싸웠다.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는 내내, 다시 갖게 될 작은 것들을 생각하며 견디고 또 견디고 있다.

영국의 작가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에 “이 세상의 광야를 걷다가 나는 우연히 동굴이 있는 곳을 만났다. 나는 거기 누워 잠을 잤는데 자면서 꿈을 꾸었다”라는 글이 있다. 힘들 때 생각하는 문장이다. 이 소설 이야기처럼 꿈을 꾸고 깨어나면, 사소하지만 위대한 나의 일상을 꼭 끌어안고 놓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정리=유영대 종교기획위원 ydy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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