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팍한 삶이라도 마음 먹으면 누구나 나눔 실천

최근 대전산성교회에서 만난 김애란 권사. 지난해 12월 ㈔월드휴먼브리지에 6000만원 상당의 재산을 사후 기부하기로 약정한 그는 “기부를 결심하고 나니 정말 가슴이 후련했다. 앞으로 한국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기부에 동참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대전=신석현 포토그래퍼


“내가 일찍 죽어야 하는데….”

농담처럼 들리는 이런 이야기를 할머니는 몇 번이고 반복했다. 할머니는 지난해 12월 ㈔월드휴먼브리지에 6000만원 상당의 재산을 사후 기부하기로 했는데, 세상에 보탬이 되려면 하루빨리 자신이 하나님 품에 안기는 방법밖에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재산이 더 많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정말 얼마 안 되는 액수여서 인터뷰 같은 건 안 하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그러더군요. 저의 모습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도 있다고. 그래서 인터뷰 요청을 승낙하게 된 겁니다.”

할머니는 대전산성교회(지성업 목사)에 출석하는 김애란(74) 권사다. 최근 이 교회 카페에서 만난 김 권사는 “내가 가진 것들이 생명을 살리는 일에 사용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고 거듭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기부를 결심하고 실천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평생의 소원이었던 기부

김 권사는 누구보다 굴곡진 삶을 살았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전쟁 탓에 어린 나이에 부산으로 피란을 떠나야 했고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신앙생활을 본격적으로 한 것은 1970년대 중반 부산 수영로교회에 출석하면서였다. 고(故) 정필도 목사가 교회를 개척해 전도에 매진하던 시기였다. 김 권사는 “당시 수영로교회 성도는 20명 정도밖에 안 됐다”며 “정 목사님과 함께 사람들을 전도하면서 큰 보람을 느끼곤 했다”고 회상했다.

그다음 이어진 삶은 덜컹거림의 연속이었다. 김 권사는 “젊은 시절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국민일보 취재진은 인터뷰 내내 조심스럽게 주고받은 질문과 답변을 통해 김 권사의 삶을 짐작해야 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김 권사는 젊은 나이에 남편과 갈라선 것으로 보인다. 딸의 양육은 남편이 맡았으며, 이후 대전으로 거처를 옮겨 86년부터 대전산성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젊은 시절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올해 마흔여덟 살이 된 딸은 캐나다에 산다고 했는데, 김 권사가 기부를 결심한 것은 바로 이 딸 때문이었다.

“딸이 열 살이 될 때까지만 함께 살았고, 그 뒤에 저는 양육에서 손을 떼야 했어요. 정말 가슴이 아프더군요. 딸을 내가 키우지 못했기에 아픈 아이들을 볼 때마다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심장병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눈길이 갔어요. 하지만 돈이 모이지 않더군요. 돈을 많이 벌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게 참 안타까워요.”

김 권사에게 아이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은 평생의 숙제와도 같았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한 건 최근 겪은 일련의 일들 때문이었다. 김 권사는 2018년 직장암 진단을 받았고 지난해 12월엔 화장실에서 낙상 사고를 당했다.

“화장실에서 발을 씻다가 자빠졌어요. 딱딱한 타일 바닥이었으니 크게 다칠 수도 있었는데 땅에 닿는 순간 바닥이 푹신하게 느껴지더라고요.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러면서 마음이 급해지더라고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빨리 재산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뜻대로 되지 않던 기부 과정

한국 사회에서 기부는 얼마간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팍팍한 삶을 살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나눔을 실천할 수 있다.

김 권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김 권사는 경제적으로 힘든 부분은 없는지 묻자 “정부 보조금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답했다. 그가 월드휴먼브리지에 내놓은 재산은 대전 중구에 있는 79㎡(약 24평) 크기의 빌라로, 2012년 매입한 이 주택은 그가 가진 거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 권사는 지난해 연말 기부의 뜻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했지만, 이후 이어진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대전의 한 대학병원을 찾아가 기부 의사를 전했으나 기부금이 자신이 원하는 곳에 쓰일지 불투명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유언 공증을 위해 찾아간 변호사 사무실에서도 달갑지 않은 상황을 마주해야 했다.

“저의 유산을 어디에 쓸지는 병원에서 결정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아픈 아이들을 위해 쓰고 싶은데 그게 불확실하니 망설여지더라고요. 변호사 사무실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변호사가 그러더라고요. 유언 공증을 위해선 증인이 필요한데 ‘가짜 증인’을 자신들이 준비하겠다고. 이런 말을 들으니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김 권사는 결국 대전산성교회에 이 문제를 논의했고, 교회가 월드휴먼브리지의 사역을 소개하면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다. 유언 공증에 증인으로 나선 이는 김 권사와 오랫동안 교제한 이 교회 오우근 목사와 민경주 전도사였다. 인터뷰 자리에 동석한 두 사람은 당시의 상황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월드휴먼브리지의 기부 프로그램을 소개하니 권사님께서 ‘교회여서 믿을 만하다’고 하시더군요. 권사님이 품은 마음이 세상에 잘 구현될 수 있도록 끝까지 도울 생각입니다.”(오 목사)

“권사님은 그동안 꾸준히 말씀하셨어요. 아이들을 돕고 싶다고. 권사님의 이런 마음이 정말 귀하다는 생각이 들어요.”(민 전도사)

대전=특별취재팀 박지훈 최경식 신지호 기자, 조재현 우정민 PD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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