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법과 관시의 버성김에서



오래전 일이다. 개인 사정으로 퇴사를 하는 동료가 자신을 해고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왜? 무슨 이유로? 실업급여를 받기 위함이라 했다. 다른 출판사들도 다 그리한다고. 고민이 깊었다. 편의를 봐줘야 하는지 냉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선택이었다. ‘관시(관계)’를 소중히 여길지 법을 존중할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결론은 ‘편의를 봐 줄 수 없다’였다. 야박하게도.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 좌우명으로 하는 나와 공공성을 함유한 법인 대표로서의 유별함이 부딪치는 경험이었다. 공공재와 같은 홍성사의 보편적 경영을 위해 내린 제법 긴장된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혹여라도 절체절명 상황이었을지 모를 동료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다.

10명 남짓 동료들과 동고동락하며 책을 만드는 개인 사업장도 인정머리를 포기하고 대표직을 수행하는 일이 허다하다. 그럴 때마다 도대체 경우의 수도 생각하지 않고 노사 간 싸움을 방치하는 법을 누가 만드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현장에서 일어날 충돌을 예측도 하지 않나? 그 법으로 야기될 사회적 비용은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할까? 그때마다 난 태권V가 나온다는 그 여의도 건물의 사람들을 미워하고 청와대 주인장들에게 분노했다.

이 나이가 돼서야 눈치챈 것 하나. 대한민국의 법은 가끔 대형 사고로 여론에 편승해 급히 만들어지는 법과 오랜 시간 누군가의 주도면밀한 물밑 작업을 통해 수고와 노력이 투입되고 절차를 밟아 제정되는 법이 있다. 그런데 이를 작동하게 하고 목적한 결과를 보기까지 관시가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관시에서 제외된 일터와 사람들은 그 법으로 역차별당하거나 아예 해당 사항도 없게 되는 일이 생긴다. 관계자들끼리의 토론과 예측으로 일단 만들어 놓고 본다. 쓰면서 고쳐간다는 것이다. 시행 과정에서 그 법으로 인해 숱한 사람의 불편은 여러 해 여러 겹 쌓여 노출된다.

그뿐인가. 정부 산하 각 기관에서 만들어내는 실질적인 규범 조항들은 항상 행정적 판단에 따라 우선 적용되는데 이 또한 관시가 작동된다. 왜냐하면 정부 주요 인사들이 관시에 의해 임명되기 때문이다. 관시의 망이 크고 두터우면 여론몰이가 가능해지는데 필요한 정보의 명암을 시의적절하게 조절하는 힘을 갖는다. 가릴 것은 가리고 부풀릴 것은 부풀리는 기술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전 정부는 당신들 철학 동아리(?)의 관시를 정부 조직에 적용했고, 현 정부는 그 철학 동아리의 관시를 다시 당신들의 관시로 교체하려고 애쓰고 애쓴다. 어쩔 수 없어 보인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

옌볜의 소설가와 이야기를 하다 계약서에 대한 사고의 차이를 발견했다. 소위 서구 유럽의 문화권에서는 시간이 지나도 변개하지 않기 위해 계약서를 주고받는다. 반면 중화 문화권에선 시간이 지나면 사람과 상황이 변하기 때문에 계약서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아뿔싸! 엄청난 차이다. 서양인과의 계약은 문서가 중요하다. 중국인과의 계약은 문서보다 관시가 더 중요하다를 알게 된 계기다.

전 정부 인사들은 중국과의 인연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이들이다. 현 정부 인사들은 미국과의 인연이 있어 보인다. 덕분에 대한민국은 어쩔 수 없이 관시와 법의 냉온탕을 오갈 수밖에 없다. 살피면, 그 출발은 조선의 마감과 잇닿았다. 항일이란 큰 물결을 사이에 두고 이편저편으로 나뉘어 중국을 본거지로 삼거나 미국을 본거지로 삼았던 선각자들의 자리가 그랬으니 말이다. 그래서 역동적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의 시대적 화두는 무엇일까. 국민 모두가 앙망하는 이 강물의 실체를 구체화해 관시도 법도 이에 부응하게 할 지혜가 절실하다. 버성김은 번뇌를 지나 반드시 부활의 기쁨에 다다른다. 이 또한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겠는가.

정애주 홍성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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