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양구 (5) 아내와 운명적 만남… 결혼과 고시 같은 해 모두 패스

이양구 전 우크라이나 대사는 1984년 2월 외무고시에 합격하고 9개월 뒤 결혼식을 올렸다. 이 전 대사는 태어나 잘한 일 세 가지 중 하나로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룬 것이라고 말한다.


1984년은 나에게 10년의 암흑기가 끝나는 해인 동시에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 그해 2월 외무고시에 합격했고 11월엔 결혼도 했다.

요즘 간증할 때면 얘기하는 게 있다. 내가 태어나 제일 잘한 세 가지다. 하나님 영접, 집사람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룬 것, 외교관이라는 직업을 갖게 된 것이다. 세 가지 중 두 가지가 84년에 이뤄졌다.

무엇보다 아내와의 만남은 기적 같았고 운명적이었다. 82년 4월 대학 졸업여행에 갈 마음이 없어 홀로 여행을 떠났다. 덕유산을 넘어 고향인 함양에 머물다 지리산을 오르는 일정이었다. 고향 누님과 함양 인근 목장을 방문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을 때다. 그곳엔 서울 일정을 마치고 온 아내가 있었다. 고향 누님은 자신의 동생 친구인 아내와 아는 사이였다. 나도 자연스럽게 인사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교제를 시작한 건 그해 12월이었다. 고향 모임에서 다시 아내를 만났고 그때부터 연애가 시작됐다.

연애하고 공부하며 고시에 합격하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외무고시를 쉽게 봤을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외무고시가 잘 맞았던 것 같다. 외무고시는 책 하나를 깊게 파는 게 아니라 다양한 분야를 고르게 공부해야 했는데 이런 특성이 나에게 맞춤이었다.

대학 졸업식의 해프닝도 있었다. 학사 경고로 졸업에 필요한 140학점을 채우지 못했다는 걸 마지막 학기 때 알았다. 어머니와 형님에게 코스모스(늦여름) 졸업을 말할 수 없었다. 83년 2월 나는 아침 일찍 학교로 가 졸업 가운과 학사모를 받은 뒤 동기들 사이에서 졸업장 없는 졸업식을 했다. 지금 졸업 사진을 보면 혹여 어머니와 형님에게 들킬까 봐 긴장한 표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있다.

83년 9월엔 입대 영장이 나오기도 했다. 연기되지 않으면 11월 군에 입대해야 했다. 어릴 때부터 떨어져 살던 아버지가 마침 대구에 계셨고 병무청과 협의해 입대는 연기됐다.

덕분에 극적으로 84년 외무고시에 합격했고 연수를 받은 뒤 12월부터 외교부 근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듬해 3월엔 군에 입대했다. 고시에 합격한 군 미필자는 군에 들어가야 했고 현역 대상이면 장교로 복무하게 돼 있었다.

영천 3사관학교에서 3개월, 광주 보병학교에서 4개월 등 훈련을 받는 7개월은 군 생활 중 가장 힘들었다. 훈련 기간엔 외박과 면회가 제한돼 있어서다. 25세 젊은 가장이었던 나는 두고 온 아내와 갓 난 아들이 걱정됐다.

이후 임진강 근처 경기도 파주시 101여단 소대장으로 배치되면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그나마 늘었다. 아내가 부대 인근에 집을 구했기에 가능했다. 그 사이 둘째 딸도 태어났다.

3년간 군 생활을 하며 배운 것도 많다. 북한이 바로 앞에 있으니 국가관, 안보관은 자연스럽게 생겼다. 전략적 사고와 전술적 사고도 갖게 됐다. 소대장으로 있으니 리더십도 절로 생겼다.

특히 안보와 외교는 동전의 양면이라는 걸 알게 됐다. 외교가 뚫리면 전쟁, 전쟁이 끝나면 안보를 위한 외교가 필요했다. 예견되는 위기를 찾아 예방하고 대응하며 관리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군 생활을 하며 외교적 역량을 키운 셈이 됐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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