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양구 (4) 맹장 수술로 전교 석차 떨어져… 10년 암흑기 시작

이양구 전 우크라이나 대사는 중학생 때부터 방학만 되면 서울에 있는 형님 집으로 친구들과 놀러왔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이 전 대사(왼쪽)가 친구와 함께 당시 외교부가 있던 서울 종로구 정부청사 앞에서 사진을 찍은 모습.


형님 덕에 정규 중학교엔 입학했지만 노는 게 좋은 아이였다. 공부와 담을 쌓았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놀러 다녔다.

이 때 보이지 않는 손이 또 다시 내 삶에 개입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만난 친구다. 공부를 제법 잘하는 이 친구는 학교에서 집까지 거리가 꽤 멀었다. 읍내 우리 집에서 자고 학교에 등교하는 일이 많아졌다. 같은 공간에서 친구는 공부하고 나는 그 옆에서 잠을 잤다. 시간이 가니 왠지 모를 치기가 생겼고 자연스럽게 나도 공부하게 됐다. 덕분에 나는 1975년 명문고인 진주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천하를 다 잡은 듯 자신감이 충만하던 이때부터 10년에 걸친 내 인생의 암흑기가 시작됐다.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을 때였다. 배가 아파 진주제일병원에 갔더니 급성맹장이었다. 수술하고 입원해 일주일에 한번 보던 주초고사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추락을 경험했다. 주초고사를 보면 그 전에 본 시험 성적까지 합해 평균으로 석차를 매겨 복도에 붙였다. 전교생 600여명 중 400등이었다. 당시 서울대 입학이 목표인 나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성적이었다. 나는 촌놈이 출세해 가난을 벗어나는 방법은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것 뿐이라 여겼다. 의사는 생각도 못했고 외무고시는 알지도 못하던 때였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이단아처럼 살았다. 수학시간엔 영어 공부하고 영어시간엔 국어 공부했다. 그렇게 공부를 안 하면서도 무슨 자신감인지 ‘서울대 간다’는 생각만큼은 굳건했다.

서울대 도전은 실패했고 재수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에 취업한 형님 집에 머물며 입시학원에 다녔지만 잘 될 리 없었다. 두 번째 입시에서도 서울대엔 들어가지 못했다. 결국 후기대인 한양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갔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삼수를 준비했다. 또 실패였다. 관악산을 배경으로 세워진 서울대 합격자 명단은 지금도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가능성도 없는 것에 혼자 욕심내고 도전하며 상처받았다.

대학생활은 앞서 말 한 대로 암흑기였다. 개인적으로도 힘들기도 했지만 시대적으로도 불우한 때였다. 대학에 입학한 1979년엔 10·26과 12·12가 있었고 이듬해엔 5·18이 있었다. 힘들 때면 보통 신앙을 붙드는데 나는 그렇지도 않았다.

그러다 1980년 운명처럼 외무고시라는 걸 알게 됐다. 형님 댁에서 한 방을 쓴 또 다른 형이 있었다. 엄밀히 말해 형의 처남이었고 나에게는 사돈이었다. 그 형이 내 전공 등을 고려해 외무고시를 제안했는데 이상하게 와 닿았다. 역경의 열매를 통해 기억을 되돌려 보니 외교관은 나에게 운명과도 같은 직업이었다.

국민학교 시절 나는 유독 만화와 영화를 좋아했다. 만화가게 주인조차 외상으로 만화책을 빌려줄 정도로 나는 VIP 손님이었다. 고등학생 시절엔 진주의 5개 극장에서 동시 상영하는 영화란 영화는 다 봤다. 대학생이 된 뒤에도 영화 사랑은 계속됐다.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영화가 있다. 서울 중앙극장에서 본 ‘닥터 지바고’다.

취미인 영화와 만화로 나는 상상력을 키웠고 넓은 세상을 봤다. 그리고 외무고시는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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