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양구 (3) 삶의 지평 열어준 어머니… 늘 나눔과 섬김 실천

이양구 전 우크라이나 대사는 어머니 하판순 권사를 통해 나눔과 섬김의 삶을 배웠다. 사진은 이 전 대사가 1989~91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에서 연수받던 시절 어머니(왼쪽)가 교회 성도와 함께 인근 해변에서 사진촬영하는 모습.


무엇보다 내 삶의 보이지 않는 손 중 가장 큰 손은 어머니다. 어머니는 늘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셨고 어릴 때부터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자랐다. 넉넉지 않은 살림인데도 집에는 항상 손님이 많았다. 우리 집이 함양 읍내에 있다 보니 5일장이 열릴 때면 특히나 손님들이 많이 오셨다. 그때는 교통편이 좋지 않아 외진 곳에 있는 사람들은 장터에 오려면 큰 결심이 필요했다. 장 열리기 하루 전에 와야 다음 날 장터에 갈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그들에게 잠잘 곳과 먹을 걸 제공하셨다.

물질적 지원만 하시는 게 아니었다. 어려운 가운데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위로하고 격려하셨다. 그러니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나에게도 어머니는 긍정과 희망의 가치관을 심어주셨다. 태몽 등 꿈 이야기를 하시며 “넌 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말아라” 라며 용기를 주셨다. 나는 자연스럽게 자존감도 높아졌다.

신앙이 없던 어머니를 교회로 이끈 건 형이었다. 당시 교회는 사람들과 교제하며 문화 공연을 경험하는 장소였다. 뜨거운 신앙의 회복도 일어났다. 형을 통해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게 됐고 할머니도 전도했다.

어머니 하판순 권사는 교회에 다니게 되면서 섬김에 더 많은 열심을 내셨다. 평생 새벽기도를 멈추지 않으셨고 전도에도 힘을 썼다. 나도 어머니의 전도 대상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교회 예배당에 앉아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웠다.

교회에 관한 기분 좋은 기억도 있다. 주일예배나 부흥회에 참석하고 늦은 밤 예배당을 나오면 밖은 깜깜했다. 읍내에 집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시절 가로등도 없을 때였다. 어린 나이에 캄캄한 밤길은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과 골목이 떠나가라 불렀던 찬양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고향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함양은 내 삶에 소중한 영향을 줬다. 앞서 이야기했듯 대구로 전학 가는 줄 알고 마냥 좋아할 정도로 도시를 부러워한 적이 있다. 지나고 보니 전학이 무산돼 시골에서 자란 건 큰 축복이라는 걸 알게 됐다.

고향에서 나는 어머니 농사일을 도왔다. 한여름 밤이면 원두막에서 수박밭도 지켰다. 농촌의 삶을 통해 사계절 자연의 변화를 경험했고 자연 친화적 성품을 갖게 됐다.

야성도 고향이 준 빼놓을 수 없는 선물이었다. 어릴 적 시골에서는 별다른 놀 거리가 없었다. 전쟁놀이를 하고 여름 장마철에 물이 불어난 냇물에 뛰어들기도 했다. 비 오는 여름밤이면 친구들과 공동묘지 다녀오기를 하며 자신의 담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인성과 사회성을 키운 곳도 고향 함양이었다. 시골은 워낙 좁은 사회여서 어른들께는 예의를 지키고 친구 관계는 원만히 해야 했다. 훗날 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됐다.

고향은 어른이 돼서도 나를 격려하는 곳이었다. 외교부에 들어갔을 때는 축하를 건넸고 대사나 총영사로 부임할 때면 마을 어귀에 플랜카드를 걸어 함께 기뻐해 줬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 누군가 나에게 기대를 갖고 있다는 건 삶 속에 동기부여가 된다. 내가 고향을 택한 것도 아닌데 내가 받은 혜택은 늘 차고 넘쳤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뤄진 일이 아닐까.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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