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양구 (2) 내 삶의 울타리 돼 준 ‘천사’ 형과 할머니의 사랑

이양구 전 우크라이나 대사는 축복 받은 가정환경에서 자랐다고 고백한다. 세 살 무렵 이 전 대사(가운데)가 ‘천사’라고 불렀던 형(왼쪽), 섬김의 삶을 알려준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은 내 삶에 꽤 어릴 때부터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개입하신 것 같다. 두세 살 때였을까. 어머니와 함께 찾아간 곳에 나에게 형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형은 나보다 10살 많았고 아버지는 달랐다.

형의 아버지는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하셨다는 걸 훗날 어머니에게 들었다. 그 시절 남편 없이 여성 홀로 생계를 책임지며 아이를 키우는 건 쉽지 않았다. 형의 조부모에게 형을 맡겨두고 어머니는 재가하셨다. 그리고 내가 태어났다. 형의 본가와 내 집은 경남 함양 읍내에 있었고 불과 4㎞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어머니에게는 멀게만 느껴졌던 것 같다.

형님이 가끔씩 어머니를 보러 오셨지만 어머니는 두고 온 큰아들을 늘 그리워하셨다. 결단을 내리셨다. 나의 아버지와 헤어져 두 아들과 함께 사는 삶을 선택하셨다. 형과 형의 할머니가 살고 있는 본가로 들어가게 됐다.

나야 워낙 어릴 때라 기억도 못하지만 형이나 할머니는 내 존재를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을 듯하다. 나는 그저 생면부지 아이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세상의 시선으로 본다면 이런 환경에서 내 삶 역시 편치 않았을지 모른다. 얼마나 눈칫밥을 먹어야 했을까. 얼마나 구박을 받았을까.

그런데 하나님의 개입 덕이었는지 나는 구김살 없이 컸다. 긍정적이었고 콤플렉스도 없었다. 형과 할머니의 보살핌 덕이었다. 무엇보다 형은 늘 내 편이 돼줬다. 나는 그런 형을 ‘천사’라 불렀다. 할머니도 중풍으로 거동이 어려우셨지만 내 앞에 힘든 순간이 올 때면 막아주셨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가정환경이었다.

옛일들을 더듬다 보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국민학교 2학년 때쯤 대구로 전학을 갈 뻔했다. 어린 마음에 시골인 함양에서 도시인 대구로 전학 간다니 마냥 신이 났다. 어머니는 내 보따리를 싸주셨고 100원짜리 지폐도 쥐여줬다. 학교에서도 대구로 전학 간다고 인사까지 했다. 그런데 갑자기 취소됐다. 어린 마음에 대구 간다고 친구들한테 실컷 자랑까지 했는데 취소됐으니 말 그대로 충격이 컸다.

대구 전학이 무산된 이유를 알게 된 건 한참 시간이 지난 후다. 형의 고모들은 늘 내가 눈엣가시였다. 할머니에게 내 아버지가 계신 대구로 보내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할머니도, 어머니도 고모들을 막을 수 없었다. 대구행을 막은 건 형이었다. 고모들 때문에 내가 대구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불 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고모들도 자기 오빠의 아들만큼은 어려웠나 보다. 결국 대구행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형님이 내 삶의 울타리가 된 일은 또 있다. 어머니는 나를 보육원에서 운영하는 비인가 중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하셨다. 학력이 인정되지 않는 곳이라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들어가려면 검정고시를 봐야 했다. 어머니는 어차피 농사나 지을 텐데 정규 중학교에 가서 뭐하나 싶었다고 하셨다. 그때도 형님이 “동생 양구는 정규 중학교에 입학해야 한다”며 어머니와 싸우셨다.

형님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대구로 갔을지 모른다. 대학교는커녕 중학교 학력도 없었을 수 있다. 그러면 내 삶은 어떻게 됐을까. ‘천사’ 형과 할머니, 어머니는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던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정리=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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