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예수] “군 복음화는 한국교회 미래 살리는 일… 군 선교사로 충성!”

지난 13일 국민일보에서 만난 김학주 장로. 그는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늘 대화할 수 있는 동행자”라며 “나의 중심을 보는 분이니 두렵기도 하지만 그만큼 이해하고 오래 참아 주시는 분이라 더없이 좋다”고 말했다. 사진=신석현
 
김 장로(앞줄 왼쪽 세번째)가 2014년 7월 31일 서울 예능교회에서 전역 감사예배를 마치고 연대장, 사단장, 군단장, 항공작전사령관 시절 군종참모로 사역했던 목사, 사모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김학주 장로 제공
 
2017년 11월 경기도 파주 한소망교회에서 간증 집회 강사로 초대된 김 장로(오른쪽)가 기도하는 모습. 왼쪽 안경 쓴 이는 예장통합 총회장인 류영모 한소망교회 담임목사다. 김학주 장로 제공


한국기독교군선교연합회 법인이사인 김학주(65·록원교회) 장로가 복음을 접한 건 1972년 서울 경동고 1학년 때였다. 처음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거부하고 핍박했다. 불신 가정이었던 김 장로 집안에서 처음 예수님을 알게 된 사람은 당시 이화여대 3학년이던 막내 누나였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누나는 1년에 한두 번 불공을 드려온 어머니에게 집요할 정도로 복음을 전했다. 누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집안에서는 ‘대학 가서 예수쟁이 됐다’고 핍박을 받았다.

어린 김 장로는 누나가 불쌍하지 않고 더 미워졌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점철된 것이 성경이라고 믿었던 김 장로도 함께 누나를 핍박했다. 온 집안이 모두 적이었는데 누나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도 변화하지 않았다.

불현듯 김 장로는 생각했다. “도대체 기독교는 어떤 마력이 있기에 멀쩡한 누나를 바보로 만들었을까.” 기독교를 연구해서 그 허구성을 낱낱이 파헤쳐야겠다고 다짐했다. 누나를 공격하기 위한 무기로 무장하겠다는 뜻이었다.
 
핍박 위해 잡았던 성경, 꿀 송이로 변하다

‘기독교 연구’를 위해 김 장로는 무작정 근처 교회를 찾았다. 물론 집안에는 비밀로 했다. 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를 비롯해 매주 꼬박 4번의 예배에 참석했다. 모든 설교는 노트에 빼곡히 적어나갔다. 내용 중에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엑스’ 표시를 해뒀다. 그렇게 6~7개월이 흘렀다. 학교 공부도 열심히 했을 때였다. 그런데 공부하면서도 바로 전에 읽었던 성경의 다음이 궁금했다. 공부를 마치고 빨리 성경을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면서 오히려 공부도 더 집중됐다. 어느 순간 부정하던 모든 말씀이 믿어지기 시작했고 꿀 송이처럼 단 말씀을 경험하게 됐다. 김 장로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은혜를 주신 순간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제 의지하고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저를 택하신 것”이라고 고백했다.

고교 1학년 말쯤이었을까. 한참을 망설이다 누나에게 말했다. “사실 교회 다녔었다. 더 알아보고 싶다”고. 누나는 구체적인 신앙생활 방법을 알려줬다. 동네 교회를 소개해 줬고 예배만이 아니라 성경공부도 꼭 참석하라고 당부했다. ‘정식’으로 다닌 교회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교회였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교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고등부를 맡고 있던 문정선 선생님. 당시 그는 군 제대 후 복학한 고려대 경영학과 4학년 학생이었다. 김 장로는 “문 선생님은 나의 기독교 전체에 대한 무지함과 함께 지적 호기심 또한 남다르다는 점을 단번에 알아보신 것 같았다”며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신앙의 알파와 오메가를 알려주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고 회고했다. 매주 목요일 저녁에는 문 선생님과 함께 당시 주로 대학생을 중심으로 모이던 ‘조이 클럽’의 집회에 참석했다. 성령의 뜨거운 바람을 온몸으로 체험한 순간들이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자 그의 삶은 완전히 다른 삶으로 변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찼고, 학교에 가서도 친구들을 만나면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했다. 대기업에 취직했던 문 선생님은 다시 총신대에서 신학 공부를 한 뒤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에서 목회하다 현재는 아이티 선교에 전념하고 있다.
 
군 선교 위해 육사 선택하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이 무엇일까.’ 하나님을 만난 후 김 장로는 늘 고민하고 기도했다. 결론은 복음 증거자의 길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직업은 떠오르지 않았다. 2학년 가을 태릉 사격장에서 열리는 고등부 공기총 사격대회에 학교 대표로 참가했던 날이었다. 말이 대표지 특별활동의 하나로 사격반에 편성된 정도여서 일찌감치 예선에서 탈락해 집으로 향하던 길, 맞은편 육군사관학교 교정이 유난히 아름답고 멋지게 들어왔다. 때마침 생도들은 체육시간인지 각자 태권도복, 유도복, 검도복 등을 입고 줄을 맞춰 달려가고 있었다. 김 장로는 한동안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육사를 나와 군에 가면 많은 병사를 지휘할 수 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군 복음화를 위해’ 육사에 지원하게 된다.

육사에 들어간 후 군 생활과 신앙생활을 병행하는 것은 항상 힘들었다. 당장 4주간 기초군사훈련을 마치고 육사 생도대 생활을 시작할 때 지원동기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군 복음화를 위해 육사에 들어왔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바람에 1학기 내내 불교 신자 선배 생도에게 지속적이고 치욕적인 얼차려를 받아야만 했다. 대령 때였다. 장군 심사를 한 달여 앞두고 군사령관 회식 자리에서 난감한 일도 당했다. 유독 크리스천을 싫어했던 사령관이 주는 술잔을 거부하면서 완전히 눈 밖에 나버린 것이다. 진급심사 때는 해당 부대 장성급 지휘관이 작성한 ‘추천서열’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장군 진급이 물 건너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김 장로의 장군 진급 심사가 있던 그해에만 추천서열 제도가 폐지되는 기적을 보여주셨다. 김 장로는 “기독교에 우호적이지 않은 상급자를 만날 때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영적 투쟁을 해야 했다”면서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혼자 깨끗한 척한다는 이유로, 음주문화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이유 등으로 다른 사람들이라면 겪지 않을 마음고생을 겪었다”고 토로했다.

그럴 때마다 김 장로는 기도했다. 우선 그를 핍박하는 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김 장로는 “기도하면 그들이 변해 내 지지자가 되거나, 아니면 철저히 무너지는 경우를 많이 봤다”면서 “하나님은 정말 기적같은 방법으로 응답하셨다”고 고백했다.

김 장로는 또 부하들의 생명을 지켜달라고 기도했다. 군 생활 동안 부하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생명을 지켜 사회로 내보내는 것을 가장 중요한 책무로 여겼다. 그는 “소대장부터 연대장까지 각각 두 번씩 지휘관으로 일하면서 안전 위주로 지휘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한 훈련을 시켰지만 단 한 명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 장로가 대대장을 하던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매년 육군에서만 450명 가량의 병사가 각종 사고로 목숨을 잃을 때였다.
 
인생의 위기 있었지만 신앙의 위기 없어

김 장로에게도 신앙의 위기가 올 때가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김 장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할 만큼의 근본적인 위기는 없었다”면서 “저에겐 그게 바로 큰 은혜”라고 말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김 장로는 2010년 3월 26일 발생한 ‘천안함 폭침 사건’ 얘기를 꺼냈다. 당시 김 장로가 사단장을 마치고 합참 작전부장으로 근무할 때였다. 북한군 도발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었지만 언론과 국회는 우리 군의 보고와 대응에 초점을 맞춰 문제 삼았다. 견디다 못한 국방부는 감사원의 감사를 요청했다. 하지만 결론은 김 장로를 비롯해 10여명의 부하 장교들에 대한 ‘형사처벌 권고’였다.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지고 물러나면 되지만 아직도 감사 결과에서 용납할 수 없는 항목은 ‘허위 보고’와 ‘문서 조작’이다. 김 장로는 “도덕과 명예를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며 살아온 군인으로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굴레였다”면서 “감사원 감사를 받을 때는 정말 사무실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었다”고 말했다.

김 장로는 인생 최대 위기를 역시 기도로 극복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니 상황에 순종하자”고 다짐했고, “고통마저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 결과 김 장로는 천안함 사건으로 인해 진급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뒤늦게 중장으로 진급했고, 육사 동기 중 군단장에 보직되는 마지막 한 사람이 됐다.

김 장로는 “군 선교는 나의 인생”이라고 말한다. 2014년 전역한 그의 제1 기도 제목은 여전히 군 선교다. 김 장로는 지난 13일 인터뷰에서 “군 선교는 한국 교회 미래를 살리는 선교”라며 “앞으로도 군 선교사로서 사명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어려운 여건에서 헌신하고 계신 목회자와 선교사님들을 돕기 위해 남은 인생을 온전히 드리길 원한다. 후배들에게 좋은 신앙적 도전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간증집도 준비 중이다. 정해 둔 제목은 ‘세상의 별보다 하늘의 별을 사모한 하나님의 군사’다. 김 장로를 이처럼 잘 설명한 표현이 있을까.

맹경환 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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