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예수] “시각장애는 고수에게 단점? 주님은 그 대신 마음의 눈을 주셨죠”

조경곤 집사가 최근 인천시 미추홀구 인천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에서 제자 소리꾼의 소리를 따라 북채를 들고 박자를 맞추고 있다. 인천=신석현 인턴기자


무대 오른쪽에 앉은 고수(鼓手)가 북을 치며 “얼씨구! 그렇지! 으흠! 좋다~!”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고수의 시선은 앞에 선 소리꾼에 고정됐다. 눈을 감은 그는 북채와 손으로 소리에 집중한 채 음과 박자를 맞춰가며 북을 쳤다. 여느 국악 공연의 한 장면과 다를 바 없을 만큼 자연스러웠지만,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이 있다. 바로 이 고수가 시각장애인, 그것도 무형문화재이기 때문이다. 인천광역시무형문화재 23호 고법(북·장구) 예능 보유자 조경곤(55·인천순복음교회) 집사 이야기다.

최근 인천시 미추홀구 인천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에서 만난 조 집사는 “스물여섯의 나이에 단돈 1만5000원을 들고 서울에 올라왔다”며 “우여곡절과 피나는 노력 끝에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오로지 하나님 덕분”이라며 웃었다. 이날은 그가 14명의 제자와 함께 발표회를 연 날이었다. 그는 진도아리랑과 춘향가, 흥보가 등 15곡의 흔쾌한 국악을 선보였다.

조 집사는 2013년 ‘판소리 고수’ 부문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인천 최초의 시각장애인 무형문화재가 됐다. 2019년 장구 문화재까지 합해 무형문화재로 선정되면서 당시 장애인으로는 세계 최초이자 국내 유일의 고법 문화재가 됐다.

판소리라 하면 대부분 소리를 하는 가객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악보가 없는 판소리에서 고법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다. 가객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소리에 따라 장단을 짚어주어 호흡을 조절하는 것도, 사이사이 가객의 발림을 보고 추임새를 넣어 소리판의 흥을 고조시키는 것도 고수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인천시 서구 문화관광체육과 홈페이지는 “가객의 입 모양이나 북과 북채 사이의 거리를 볼 수 없다는 것은 고수로서 엄청난 단점이 아닐 수 없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리와 손끝의 감각만으로 장단을 맞춰야 하는데 각고의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며 “조경곤 무형문화재가 1급 시각장애를 갖고 있다는 데에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했다.

조 집사는 “고수는 반드시 노래를 부르는 소리꾼의 입 모양을 정확히 보며 호흡을 감지해 박자를 맞춰야 한다”며 “지금처럼 완벽하게 연주하기 위해 그야말로 머리카락이 반 이상 탈모 되고 무릎과 가슴에 멍이 들고 손바닥에 피가 나고 까지고 하는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고 담담히 말했다.

그는 국악을 하는 큰아버지와 아버지를 둔 탓에 어렸을 때부터 노랫소리와 북소리에 익숙했다. 국악인은 배고프니 하지 말라는 가족의 만류에도 그의 국악 사랑은 접을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하지만 고등학생 때 격투기 운동을 하다가 눈을 다쳤다. 그 후유증으로 녹내장이 생기고 망막박리 질환까지 오면서 점점 빛을 잃었다. 30대 초반부터는 거의 실명 상태로 살았다.

부모님 몰래 용돈을 모아가며 소리를 배우던 조 집사는 26세가 되자 더 큰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고 싶어졌다. 차비 1만5000원만 들고 더듬거리며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홀로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평소 장애인과 국악에 관심이 컸던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한 권사님을 알게 됐다. 그의 도움으로 당시 서초동 꽃마을 단지 내 비닐하우스촌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조 집사는 “소리를 배우기 위해 더듬거리며 지하철을 타고 국립국악원에 갔다”며 “철로 위로 떨어져 죽을 뻔한 구사일생의 순간도 숱하게 겪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왼쪽 눈썹 끝에 난 상처는 숱한 사고로 인한 영광의 상처”라며 웃었다.

신앙도 그 무렵 갖게 됐다. 유년 시절 동네 교회에 줄곧 놀러 갔던 터라 친숙했다. 게다가 타향살이에서 그가 의지할 건 하나님뿐이었다. 숱한 눈물로 밤낮을 기도하며 국악인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그의 선생들은 모두 하나같이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그에게 취미로만 음악을 하라고 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명인들의 북소리는 죄다 모아 녹음해 들어가며 북을 두드렸다. 그 결과 그만의 타법이 생길 정도로 실력이 향상했다.

하나님은 서울로 올라온 지 20년 만에 그를 무형문화재의 자리로 이끄셨다. 눈이 안 보여 기술 전수가 어려울 것이라는 회의적인 시각도 하나님은 불식시켜 주셨다. 그는 “70년 넘게 음악을 하신, 눈 뜬 제 스승조차 못 한 일인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셨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하나님께선 제게 사람의 호흡과 기운, 느낌을 체득할 수 있도록 심안을 주셨다”며 “주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시고 길을 내셨기에 가능했다”고 덧붙였다.

그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이다. 지금도 연주에 앞서 이 구절을 끊임없이 되뇌곤 한다. 조 집사는 “시각장애인으로 인생이 바뀌었지만 내 생명과 같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해주셨기에 시각장애인 무형문화재라는 의미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며 “죽는 날까지 후학 양성뿐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명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요즘 많은 이들이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는데 희망과 꿈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며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이루실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아갔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 말을 마친 그는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다시 북채를 손에 쥐었다.

인천=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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