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는 게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2015년 2월 3일 서울 서초구 사랑의교회 제자훈련 세미나 출신 목회자·평신도가 총집결해 열린 ‘칼넷 전국 순장 컨벤션’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국민일보DB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삼성그룹 창업주 고(故) 이병철 회장이 임종 전 가톨릭 신부에게 던진 질문을 개신교 개념에 맞게 다시 정리했다. 이 전 장관은 하나님은 벌하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옛날 이미지라는 얘기다. 예수님은 옆방에서 기침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아주 가까운 곳에 계시는 아주 친한 친구와 같은 분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인간은 아직도 무서운 하나님, 주먹을 불끈 쥔 하나님, 심판하는 하나님만 생각하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 시대의 신관을 아직도 어리석은 인간들은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전 장관은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끌어안고 포용하시며 용서하는 하나님”이라면서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는 그것이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故 이병철 회장의 24가지 질문’ 재정리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는 걸까요.

“인간의 고통과 불행은 신이 준 게 아니라 따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범하여서 인간이 스스로 받은 벌입니다. 뱀이 뭐라고 했나요? 너도 저 선악과를 따 먹으면 신처럼 눈이 밝아지고 지혜로워진다고 했습니다. 뱀의 말은 사실이었어요. 선악과는 지식의 나무, 신만이 가지고 있는 지혜와 선악의 판단능력을 얻게 되는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건 인간이 피조물이면서 조물주가 되려고 한 거예요. 이를테면 아들이 아버지가 되려고 한 것이나 다름없지요. 아버지가 나를 낳아줬는데 내가 아버지가 된다고요? 그건 패륜이지요. 내가 만든 물컵이 인간처럼 의식을 갖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나에게 물 따르지 마. 날 왜 깨지도록 만들었어. 나를 왜 쟤보다 작게 만들었어.” 내가 만든 물컵이 인간과 같은 의식을 가지고 불평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피조물이 조물주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뛰어넘으려 할 때 세계는 암흑과 혼돈의 세계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인간이 만든 불완전한 문명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최후의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 착한 자, 자기를 믿는 자만 구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오히려 구제가 아니라 무서운 하나님으로 비칠 수도 있지요. 인간을 정말 사랑하신다면 신께서 그렇게 가혹히 벌을 주실까요.

“이에 관해서는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 일화로 답해보겠습니다. 완벽한 성인이라고 칭송받던 조시마 장로가 죽습니다. 그런데 성자는 죽어도 썩지 않는다고 믿었는데 시체가 썩는 거예요. 그래서 그를 따르던 수도사 알료샤도 큰 절망에 빠져 매춘부 그루센카를 찾아가요. 처음으로 탈선을 결심한 겁니다. 그때 그루센카가 하나님은 성자뿐 아니라 악한 자도 버리시지 않는다고 얘기해요. 나쁜 짓만 하던 사람이 길 가다 목마른 사람에게 파 뿌리 하나를 뽑아줍니다. 그리고 지옥에 가니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파 뿌리 하나를 내려 지옥에서 구제해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자고 악인이고 다 포용하려고 해요. 인간이 끝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죠. 그런 깨달음을 얻고 알료샤가 다시 장로의 빈소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잠깐 졸게 되지요. 그때 꿈속에서 가나의 결혼식처럼 천국에 큰 잔치가 열린 겁니다. 보니까 조시마 장로도 있어서 “성자님, 그러면 그렇지 천국에 가셨네요!” 하고 기뻐하는데 장로가 “너도 빨리 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알료샤가 “저는 착한 일은 아무것도 한 일 없어 못 가요” 하고 말해요. 그걸 들은 장로가 뭐라고 했을까요? “여기 있는 사람들 다 파 뿌리 하나야, 어서 와.” 하나님은 벌하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끌어안고 포용하는 게 하나님의 본질이지요. 재판하고 벌하는 그런 이미지는 다 예수님 이전의 옛날의 이미지죠. 오늘날 작가, 신학자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신은 심판하는 무서운 신이 아니라 우리를 구제하려는 사랑의 신이지요. 예수님의 출현입니다. 곁에 있는 신이에요. 저의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도 그렇게 쓴 거예요. 옆방에서 기침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아주 가까이에 계신 외로운 하나님. 그게 릴케와 나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아직 무서운 신, 주먹 쥔 신, 심판하는 하나님만 자꾸 생각해요. 그건 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 시대의 신관(神觀)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하나님은 용서하는 하나님이에요.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는 그것이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계속 증명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처음 했던 얘기를 기억하시지요. 믿지 않으면 성경 구절은 하나도 택할 게 없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었어요. 대홍수 때 노아의 방주에 모든 생물을 칸막이로 나누어 쌍쌍이 집어넣었다고 해요. 토끼 같은 초식동물이야 풀을 먹고 살겠지만, 그 안의 사자, 호랑이 같은 육식동물은 무얼 먹고 살까요? 토끼를 잡아먹지 않겠어요? 더군다나 물고기는 물난리를 피해 노아의 방주에 들어오면 도리어 죽어요. 또 창세기에 인간이라고는 아담, 이브, 카인, 아벨밖에 없는데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이마에 표식을 받으니 다른 사람이 보고 나를 해치면 어쩌냐고 물어요. 이제 사람도 자기까지 세 사람밖에 없는데.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하나도 믿을 말이 없습니다. 지구와 공은 크기나 기능이나 비교도 안 되지만 구조적으로 보면 똑같은 구체입니다. 그런 구조적 관점에서 창세기의 제1 창조는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시간을 분절(分節)한 거고요. 제2 창조 노아의 방주는 한 칸, 두 칸으로 공간을 분할(分割)한 것이죠. 나누어지지 않은 것은 ‘카오스(Chaos)’, 혼돈이죠. 즉, 카오스에서 시간과 공간으로 분절되어 있는 코스모스로 창조된 질서를 구조적으로 보여준 것이에요.

그러므로 성경을 자구대로 직역하거나 멋대로 의역할 수 없는, 번역 불가능한 영역이 존재하지요. 그것이 바로 마귀가 돌덩이를 예수님께 보이면서 이것을 빵으로 만들라고 한 구절이에요. 널리 알려진 이 구절에서 우리는 빵을 떡이라고 번역했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정반대의 의미를 갖게 된 거예요. 주기도문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의 ‘양식’은 원문에는 분명 ‘일용할 빵’, ‘데일리 브레드(Daily Bread)’로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일용할 양식을 환유(제유법)로 나타낸 것이지요. 근데 그걸 떡이라고 해봐요. 떡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빵은 늘 먹는 거지만, 떡은 어쩌다 먹는 거예요. 그래서 예기치 않은 횡재를 보면 우린 “이게 웬 떡이야!” 하잖아요. 원래 의미대로라면 오히려 ‘밥’이라고 해야 할 거예요. 서양의 빵과 우리의 떡은 거꾸로라고 봐야 해요. 형태는 비슷해도 빵과 떡은 전혀 의미가 반대예요. 빵은 불로 구운 거고, 떡은 물로 찐 거예요. 제조 방법부터 달라요. 시루떡이라고 하잖아요. 저쪽에서는 오븐에다 굽는 거고, 우리는 시루에다 찌는 거지요. 그런데 그렇다고 밥이라고 번역하면 될 일일까요? 안 되지요. 빵과 떡은 돌덩이와 외형이 비슷하니까 납득이 되잖아요. 빵과 떡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고체지만, 밥은 개개의 밥알들이 모인 것이지요. 그래서 밥알들을 뭉쳐놓은 밥은 돌덩이와 전혀 비슷한 점이 없어요. 밥이라고 하려면 마귀가 돌덩이가 아니라 모래를 퍼주면서 “이것을 밥으로 만들어라” 하고 말해야 해요. 아예 성서에 나오는 마귀가 한 말을 바꾸지 않으면 성립이 안 돼요. 우리는 오랫동안 빵을 떡이라고 함으로써 이 구절을 정반대의 의미로 읽어온 거예요. 제가 여러 번 이 구절을 지적했듯이 형태를 따르자면 떡이라고 해야 하고, 의미를 택하자면 밥이라고 해야 하니 차라리 ‘빵떡’이라고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반 농담으로 말한 적이 있어요. 실제로 목사님이 예수님께서 “사람은 떡만으로는 살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자 시골 할머니가 그랬다잖아요. “별 싱거운 소리 다 듣겠네. 당연하지. 떡만 먹고 어떻게 살아 밥을 먹어야지.” 여기서 이 ‘떡’이라는 번역이 오역이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종교란 무엇인가요.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요.

“모든 것을 이룬 사람이 있다고 쳐봅시다. 성공해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기업인, 세계 모든 것을 알게 된 과학자, 모든 것을 성취한 이들도 알지 못하는 것, 바로 죽음이에요. 세상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다 죽었어요. 그들 중에 죽음이 뭔지 알고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이 두렵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면 종교는 없을 것이에요. 하지만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 종교의 이름이 무엇이라도 마지막 질문은 죽음에 관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병철 회장 또한 묻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에서 그보다 더 기업으로 성공을 거둘 수가 있을까요. 그런 그조차 질문하고 있어요. 바로 그 질문 속에 종교의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신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그 필요성을 인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신의 존재를 부정했지만, ‘실천이성비판’에서는 그 필요성을 인정했지요.”

윤중식 종교기획위원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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