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만명(감리교) vs 730만명(장로교) 감리교 성장 부진은 언더우드 때문?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교정에 있는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 동상. 국민일보DB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가 지난해 발표한 ‘2020년 감리교회 통계자료집’에 따르면 국내 감리교회 성도는 128만5965명(지난해 6월 30일 기준)으로 장로교회에 크게 못 미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과 통합을 필두로 주요 장로 교단의 성도를 모두 합하면 73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두 교단이 한국 선교를 시작한 시기는 비슷한데 어째서 감리교의 교세가 장로교의 그것에 크게 못 미칠까.

김칠성 목원대 교수가 최근 학술지 ‘선교신학’에 발표한 논문 ‘한국선교 초기 감리교와 장로교의 교회성장 비교연구’는 이런 궁금증에 독특한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 김 교수는 19세기 후반, 미국 선교사들이 벌인 한국 선교 초기 스토리를 살피는 것을 통해 두 교단의 성장 차이를 분석했다.

우선 감리교가 덜 부흥한 이유로 흔히 꼽히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감리교는 학교나 병원 설립에 중점을 뒀지만 장로교는 교회를 세우는 데 열심이었다. 둘째 토착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장로교가 더 충실히 따랐다.

김 교수는 이런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첫 번째의 경우 “당시 역사적 상황을 세심하게 고찰하지 않은 데서 오는 오해”라고 주장한다. 두 번째 역시 마찬가지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1890년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 존 네비우스가 설파한 선교론이다. 하지만 네비우스의 입국 이전에도 한국교회는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후발 주자였던 성결교의 경우 이 정책을 따르지 않았음에도 빠르게 성장했다.

김 교수는 그런 다음 한국 선교 초기에 장로교 선교를 주도한 호러스 언더우드의 선교관을 조명한다. 그의 선교 스타일은 다른 이들과 달랐다. 무엇보다 세례에 몰두했다. 누군가 조선 국법을 어길 수 있다고 우려하면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부탁할 때 못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답하곤 했다. 이런 태도 때문에 장로교 입교인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가령 1896년만 보더라도 장로교 입교인은 530명으로 감리교(236명)에 비해 두 배 이상 많았다.

언더우드가 1891년부터 이듬해까지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열었던 강연은 북미 지역의 많은 선교사가 한국행을 택하는 계기가 됐다.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 수는 1891년부터 차이가 나기 시작해, 1905년에 이르면 장로교 선교사가 127명으로 감리교(45명)보다 2배 이상 많았다. 이런 차이는 1909년 ‘선교지 분할 협정’에서 장로교가 감리교보다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 즉, 언더우드의 선교 철학과 장로교 선교사의 증가가 장로교 부흥의 끌차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장로교에 비해 감리교는 한국 선교 초기에 세례를 베푸는 일에 엄격했고, 적은 숫자의 선교사가 활동했다”며 “이런 차이 때문에 감리교의 성장이 장로교에 비해 더뎠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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