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거부로 2000여명 투옥… 지금의 한국교회 세운 등불

주기철(파란색 원 안) 목사와 평양산정현교회 제직들이 1937년 1월 예배 후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주 목사는 이듬해 9월부터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선봉에 섰다. 국민일보DB




신사참배 결의 이후, 대다수 기독교인은 자의든 타의든 일제의 강압과 회유에 굴복해 신사참배에 참여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시대에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을 남겨 두신 것처럼, 일제강점기에도 신사참배에 무릎 꿇지 않은 의인을 남겨 두셨다.

신사참배를 앞장서서 추진한 적극적 참여파와 강압 때문에 마지못해 따라가는 소극적 참여파가 있었던 것처럼, 신사참배를 반대한 사람들도 적극적 반대파와 소극적 반대파가 있었다.

소극적 반대 입장은 일제의 정책에 대해 적극적으로 투쟁하기보다는 초야에 묻혀 개인의 신앙 지조를 지키겠다는 입장이었다. 소극적 반대 운동의 대표자로는 미션스쿨을 운영하던 선교사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신앙을 어기면서까지 교육사업을 하는 것을 반대했기에 결국 학교 문을 닫거나 학교를 다른 재단에 넘겼다.

그런가 하면 어떤 목회자들은 신앙 절개를 지키기 위해 사역에서 은퇴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사참배 강요를 피해 외국으로 가거나 시골로 도피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여러 곳에 도피처가 생겨났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이만집 목사가 세운 금강산 수양관이다. 이 목사는 대구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3년 징역형을 받은 적도 있었다. 말년에 은퇴 후 금강산에 수양관을 세우고 신사참배를 피해 온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목숨 걸고 적극적으로 신사참배에 반대한 분들도 많다. 신사참배에 반대했다가 고난을 겪은 가장 오래된 기록은 전편에서 소개했듯 105인 사건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어떤 무명의 기독교인이라 볼 수 있다. 정주 신안학교의 교무주임이었던 이 성도는 1911년 일본 천황의 어진영 앞에서 예배하는 것을 우상숭배 행위라 여겨 거절했다가 7년 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한 저항은 1924년 강경보통학교의 학생으로 이어졌고, 1938년 신사참배 결의를 전후해서는 평양신학교로 이어졌다. 장로교 노회 가운데 평북노회가 가장 먼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이 소식에 격분한 평북노회 소속 신학생 장홍련이 평양신학교 교정에 노회장 김일선이 심은 기념식수를 베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타 노회 소속 신학생이 결속해서 아직 신사참배를 결정하지 않은 노회에 대해 신사 불참배 운동을 전개하려 했다. 그러자 그 정보를 탐지한 평양경찰서는 박형룡 김인준 교수를 불구속 심문했다. 또 주기철 목사를 이 사건 배후 조종 인물 혐의로 구속했으며, 신학생 다수를 투옥했다.

1938년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가 이뤄지자,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성도가 서로 연대를 맺고 조직적·집단적 저항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역적으로도 골고루 분포돼 있었는데, 중심 인물로는 평안남도의 주기철, 평안북도의 이기선, 경상남도의 한상동 주남선, 전라남도의 손양원, 함경남도의 이계실, 만주 지역의 박의흠 김형락 김윤섭 등이었다. 그리고 이주원 전도사는 만주와 평양, 부산 등지를 왕래하면서 신사 불참배 운동의 실황과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1940년 3월경 안동에서 회합해 신사참배를 죽어도 반대할 것, 신사참배를 하는 학교에 자제들을 입학시키지 말 것, 세속화되어 신사참배를 하는 현 교회에 절대 출입하지 말 것, 신사불참배 동지들끼리 가정예배를 드릴 것 등을 결의했다. 또 신앙 동지들을 확보해 신령한 교회 출현의 소지를 육성할 것 등을 협의하고 각 지역에서 이런 운동을 확산시켰다. 특히 1940년 4월 주기철 목사가 석방되자, 한상동 목사는 평양으로 가서 만주의 운동가들과 먼저 신사불참배 노회를 전국적으로 재건하자고 약속했다.

이런 조직적·집단적 신사참배 거부 운동과는 달리 규모가 작거나 개인적 차원의 신사참배 거부 운동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지역적으로는 전라남도의 황두연 양용근, 전라북도의 배은희 김가전, 충청남도의 정태희, 충청북도의 허성도 송용희, 경상남도의 조용학, 황해도의 이종근 박경구 등이 있었다.

또 교파적으로도 장로교는 물론 감리교의 이영한 강종근 권원호 최인규 양국주 김선규 신석구, 성결교의 박봉진 김연 정재학 최헌 천세광 김은규, 동아기독교의 전치규 김영관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일제에 의해 투옥돼 수많은 고문을 받았고 그 가운데서 조용학 주기철 최봉석 최상림 김윤섭 박의흠 권원호 김련 최태현 박관준 등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지면 관계상 다 소개하지 못했지만,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투옥된 이는 대략 2000여명에 달하고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50여명이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비록 그들의 몸은 죽었지만, 그들은 한국교회를 밝히는 등불이 되었다. 이분들이야말로 어둠 속에서 한국교회를 밝히는 빛이었으며, 그들의 순교의 피 위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서 있다.

오창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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