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영성 작가] 부조리한 시대를 살아도 선악의 혼돈 속에 갇혀도 유일한 구원의 빛은 ‘사랑’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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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둠을 밝힌다.” 프랑스의 시인·소설가·극작가였던 빅토르 위고(1802~1885·아래 사진)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의 삶을 살펴, 세상에 알려온 ‘거대한 탐조등’ 같은 작가였다. 이런 그의 성향을 집대성한 작품이 장편소설 ‘레미제라블’이다. 젊은 시절부터 사회 고발 소설을 구상했던 위고는 이 땅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레미제라블’과 같은 종류의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레미제라블’ 서문에서 불행한 사람들에게 밝은 빛을 비추는 작가의 사명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법률과 풍습에 의해 인위적으로 문명의 한복판에 지옥을 만들고, 인간적 숙명으로 신성한 운명을 복잡하게 만드는 영원한 사회적 형벌이 존재하는 한 무산계급에 의한 남성의 추락, 기아에 의한 여성의 타락, 암흑에 의한 어린이의 위축, 이 시대에 이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다시 말해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레미제라블과 같은 종류의 책들은 무익하지는 않으리라.”

단테가 시로 지옥을 그려냈다면 위고는 현실로 지옥을 만들어내려 했다. ‘레미제라블’은 1815년 워털루 전투 전날 밤부터 1830년 7월혁명, 1832년 파리 노동자 소요사태에 이르기까지 19세기 초 프랑스 사회를 배경으로 민중의 삶을 총체적으로 담아냈다. 작품은 비극과 결합한 역사이며 인간의 유형을 비추는 거대한 거울이었다.

위고는 1845년부터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가 16년 만에 망명지인 건지섬에서 이 소설을 탈고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1861년 6월 30일 아침 8시30분, 창문 너머로 비쳐드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나는 레미제라블을 끝냈다네… 이제는 죽어도 좋아”라고 썼다.
 
빛으로 어둠을 밀어내다

‘레미제라블’이란 제목은 ‘가난에 허덕이는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도 된다. 위고의 눈으로 보면 미리엘 주교를 만나기까지의 장 발장은 물론이거니와 경찰관으로서의 양심과 인간으로서의 양심의 틈바구니에서 끝내 죽음을 택한 자베르, 악의 사회에 떨어져 죄악의 화신과도 같았던 테나르디에도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이다. 선인이나 아름다운 자의 불행만이 아니라 악인이나 추악한 자의 불행도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위고의 주장이 돌멩이처럼 가슴에 날아온다.

작품에 담긴 가장 중요한 기독교적 메시지는 ‘구원은 율법이 아닌 용서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주인공 장 발장이 용서받은 죄인을 상징한다면, 그를 쫓는 자베르는 율법주의자를 상징한다. 20년간 장 발장을 추적하던 자베르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유는 장 발장이 보여준 선한 삶의 모습 때문이고, 결정적으로 자신을 죽일 기회가 왔는데도 장 발장이 그를 죽이지 않음으로, 자베르가 지금까지 믿어온 ‘종교’인 율법주의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자베르의 죽음은 결코 법이 인간을 변화시켜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없으며, 오직 복음을 통해 주어지는 용서의 은혜만이 죄인을 인간다운 삶으로 인도한다는 작가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위고는 독자들이 불쌍한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기를 원했고, 그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바람을 담아 자신의 소설에 다양한 사람을 등장시켜 비참한 세상에 드러난 숭고한 아름다움을 보여줬고, 어둠 속에 추락한 한 영혼이 빛에 ‘감화’되면서 어떻게 구원에 이르는지 보여주었다.

특히 작품은 인간에 대해, 삶에 대해, 사랑에 대해, 자유에 대해, 죄와 구원에 대해 배우고 깨닫는 즐거움을 준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모인 사회 전체가 혈연관계는 없어도 가족애를 느끼며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장 발장은 자신의 딸이 아닌 코제트에게 아버지 역할을 하고, 가브로슈도 자신과 같은 부랑아를 형제처럼 돕는다. 장 발장이 코제트와 마리우스 부부에게 남긴 유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다르지 않다. “내 사랑하는 자식들아, 이제 나는 떠나야겠다. 항상 서로를 지극히 사랑하거라. 이 세상에, 서로 사랑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은 별로 없다.”

빅토르 위고는 부모의 성격 불화로 상당히 불안정한 유년기를 보냈다. 장군이었던 부친은 위고가 군인이 되길 바랐지만 위고는 일찍부터 문학에 관심을 보여 1819년 툴루즈의 아카데미에서 금백합상을 받는 문학적 재능을 나타냈다. 위고는 1822년 ‘오드와 발라드’를 발표하면서 왕당파의 시인으로 출발했으나 시대의 흐름을 따라 점차 낭만주의 성격을 띠며 자유주의의 길을 걸었다. 특히 우리에게 ‘노트르담의 꼽추’로 알려진 ‘파리의 노트르담’과 ‘레미제라블’은 위고의 작가적 위치를 확고히 하기에 충분하다.
 
신과 영혼, 그리고 책임감

그의 결혼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아데르와의 결혼으로 한때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만 서로 다른 애인을 갖는 등 결혼생활의 균열을 맞는다. 1843년 딸이 센강을 항해하던 중 남편과 익사한 사건으로 극심한 절망감에 빠져 한때 절필하며 정치에 관심을 쏟기도 했다. 그러나 1851년 혼란스러웠던 프랑스혁명의 와중에서 벨기에로 망명한 그는 영국 해협의 건지섬에서 19년 동안 본격적인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 3세를 비난한 징벌시집(1853년) 딸의 추억과 철학사상을 담은 정관시집(1856년) 레미제라블(1862년) 바다의 노동자(1866년) 웃는 사나이(1869년) 등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쓰였다.

“신과 영혼, 책임감. 이 세 가지 사상만 있으면 충분하다. 적어도 내겐 충분했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나는 그 속에서 살아왔고 그 속에서 죽을 것이다. 진리와 광명, 정의, 양심, 그것이 바로 신이다. 가난한 사람들 앞으로 4만 프랑의 돈을 남긴다. 극빈자들의 관 만드는 재료를 사는 데 쓰이길 바란다. (…) 내 육신의 눈은 감길 것이나 영혼의 눈은 언제까지나 열려 있을 것이다. 교회의 기도를 거부한다. 바라는 것은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단 한 사람의 기도이다.”

그의 사상이 고스란히 담긴 유언장이다. 1881년 8월 31일 작성됐다. 그는 2년 뒤 유언장을 다시 짧게 수정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5만 프랑을 전한다. 그들의 관 만드는 값으로 사용되길 바란다. 교회의 추도식은 거부한다. 영혼으로부터의 기도를 요구한다. 신을 믿는다.”

그는 1885년 5월 22일 눈을 감았고, 죽음은 국장의 예를 받았다. 당시 불의한 현실에 눈을 감고 있는 교회에 실망했지만 신앙은 버리지 않았다. ‘신의 증인’으로 살았던 그의 최후의 말은 “검은빛이 보인다”였다.

이지현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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