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의 실패 등 부침을 겪으며 춘천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님과 교회 공동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들은 내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힘을 주며 예수님의 사랑으로 날 품어줬다.
2004년 제과점 사업이 부도가 났을 때도 교회 공동체는 내 어려움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상한 마음을 안고 참석한 어느 예배 시간이었다. 김 목사님은 설교 중에 “유동부 형제가 저렇게 망했는데 우리가 100만원씩만 모아줍시다. 우선 살려 놓고 잘 되면 받고, 안 되면 할 수 없고…”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난 교회 내 작은 카페에서 조각 케이크와 우유를 팔고 있었는데 교인들이 정말 많이 도와주셨다. 그 덕에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2014년 3월 마지막 7번째 사업마저 실패했다. 이젠 더는 재기가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사업도 나도 망가졌다. 당시 경기도 성남시에서 장애를 지닌 초등학교 아이들을 돌보는 보조교사로 일하던 아내와도 불화가 생겨 별거에 들어갔다. 가정까지 파탄 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던 아들이 입대한 지 8개월 만에 이름도 낯선 흉선암에 걸렸다는 소식까지 듣게 됐다. 운동을 좋아해 체육대학교에 진학했던, 누구보다 건강했던 아이였는데 말이다. 그 소식을 듣고도 난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평소대로 내가 해야 할 일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희로애락’이란 인간의 기초 감정조차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영·혼·육이 피폐해져 있었다.
마지막 사업을 완전히 접고 오갈 데가 없는 난 춘천한마음교회로 향했다. 마침 주머니를 뒤져보니 수중에 남은 돈은 3만6000원이 전부였다. 몰골도 사람 몰골이 아녔다고 볼 정도로 말이 아니었다. 예전 같았으면 예배를 마치자마자 차가 막힐까 부리나케 집으로 향했을 텐데 그러질 못하고 괜히 교회 건물 앞 개집 주변만 서성대고 있었다. 김 목사님께서 이런 날 보시며 집에 왜 안 가냐고 물으셨다. 하지만 도저히 목사님께 또다시 사업이 망했다는 말씀을 드릴 면목이 없었다. 그저 “하던 일이 뭐 좀…”하며 난 얼버무렸고, 목사님은 단번에 내 사정을 알아채셨다. 그날 저녁부터 목사님께선 한 달 반 동안 점심, 저녁 할 것 없이 춘천의 맛집이란 곳은 다 데리고 다니시며 밥을 사주셨다.
마침 아들도 의병 제대한 후 암 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다. 김 목사님께선 그런 우리 부자가 공기가 좋은 곳에서 지낼 수 있게는 해줘야겠단 생각에 교회 생활관에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
어느 날은 김 목사님께서 날 춘천시 구봉산에 있는 한 멋진 카페에 데리고 가주셨다. 차를 사주시며 여러 좋은 말씀을 해주시던 목사님은 내게 “동부야, 너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난 그저 “네”라고 대답했지만,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1년, 2년 시간이 지나며 그 말씀이 내 머리에 맴돌았다. 그리고 점점 가슴을 파고들었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