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즈음 열여섯의 나이로 서울에 홀로 올라왔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당시는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로 모여든 이들이 전봇대마다 부착된 구인광고를 보고 취직하던 일이 자연스러울 때였다. 나도 서울로 일단 올라가기만 하면 먹고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외삼촌이 살던 구로구 가리봉동에 거처를 잡았다. 그곳에서 며칠을 머물며 이따금 인근 구로공단에 나가 일할 만한 곳을 찾았다.
마냥 외삼촌 댁에만 머물 수 없을 것 같아 기숙사를 제공하는 회사 위주로 찾았다. 길을 헤매다 한 전봇대 구인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석유풍로와 연탄보일러 등을 만드는 철공소였다. 회사를 찾아갔다. 당시는 어린 나이의 학생에게도 일단은 한번 일해보라는 분위기였던 터라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회사가 마련해준 기숙사에선 20대 중후반 되는 형들과 함께 지내게 됐다. 오롯이 홀로서기의 시간이었다. 월급으로 7만원 정도 받았다. 나이가 어린 날 받아주기만 한다면, 기술만 배울 수 있다면야 급여는 중요하지 않았다. 규모가 큰 공업사였기에 사장님과 직접 대면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같이 일하는 형들과 늘 함께 다녔다. 3년 정도 형들과 함께 지내며 페인트칠부터 용접, 프레스 기계 작업 등 닥치는 대로 일을 배웠다. 하지만 좋았던 추억은 별로 없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야말로 어두운 밑바닥 생활이었다. 인격적인 대우는 기대할 수 없었을뿐더러 술과 다툼, 폭력 등이 늘 내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 어른에게서 무언가를 본받을 만한 삶은 아녔다. 형들에게 석유풍로를 다듬던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억부터 얼굴에 묻은 페인트 자국을 지우려고 ‘신나(시너)’라 불리는 페인트 도료 희석제로 세수를 하다시피 한 경우도 많았다. 한마디로 석유로 세수를 한 것과 다름없었던,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이없었던 기억들이다.
작은 프레스 기계를 다루다가 실수로 철판에 손등을 찢기는 사고가 난 적도 있다. 4~5바늘을 꿰맸는데 그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다. 하지만 당시 같이 일하던 형 중엔 손가락이 잘려서 병원에 실려 가는 경우도 많았던 터라 이 정도 사고는 아무것도 아녔다.
한 번은 같은 기숙사에 사는 형이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이 잘려나갔다. 옆에 있던 난 당황한 나머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그 손가락을 공장 벽 아래 땅속에 파묻어 버렸다. 병원에 가져가면 접합수술을 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그 덕에 난 그 형의 병시중을 다 들었던 기억도 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명절 때는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엘 이따금 내려갔던 기억이 있다. 명절 전 공장 인근의 대중목욕탕을 찾을 때면 진풍경이 벌어진다. 명절을 앞두고 목욕탕을 찾은 이들로 금세 목욕탕 물이 시커메지기 일쑤였다. 목욕한 뒤 서울역에서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여러 번 갈아타고 나서야 겨우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도 어머니대로 생존을 위해 정신없이 사시느라 경황이 없으셨지만, 그래도 항상 우리 삼 형제를 걱정하시며 최대한 뒷바라지하시려 헌신하신 점은 지금도 감사드린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