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영성 작가] 인간 내면의 밑바닥 그 비루한 민낯까지 비추는 한 줄기 빛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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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소설가 플래너리 오코너(1925~1964·아래 사진)는 ‘은둔의 소설가’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무렵인 1951년 루푸스병 진단을 받았다. 자신의 능력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고난을 담담히 받아들인 오코너는 고향 안달루시아 농장에 칩거하며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소설을 썼다.

루푸스병으로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이후 12년을 살아내 두 편의 장편 소설과 서른두 편의 단편 소설로 미국 문학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현재 세계 각 대학 영문학 커리큘럼에 빠지지 않는 작가다. 국내에 번역된 책으로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집’, 장편소설 ‘현명한 피’, 기도집 ‘기도일기’ 등이 있다. 오코너는 남부 고딕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남부 고딕 문학은 기독교적 색채가 강한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공포 신비 환상을 담은 문학 작품을 가리킨다.
 
소설가의 영적 씨름

오코너는 죽음과 가까워지는 시간 동안 야곱과 천사가 씨름을 하듯이 ‘인간의 죄악과 구원’을 주제로 글을 썼다. 역설적이게도 병마와 싸우는 고통의 시간은 미국 문학에서 위대한 작품으로 꼽히는 소설들이 탄생한 시기였다. 오코너는 57년 여름 일기에 이렇게 고백했다. “주님 제가 은둔 소설가라서 기쁩니다.…죽기 전에 질병을 앓는 것은 아주 적절한 일이고 질병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 중 하나를 놓친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코너의 작품은 거의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 속엔 외톨이와 침입자, 설교자와 연쇄살인범, 팔 없는 목수와 철학자에 이르는 다양한 삶의 부적응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믿음을 잃고 살아가며, 기만적인 현대 사회에서 무자비한 폭력과 공포 또는 예기치 못한 죽음 등을 경험한다. 오코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내면에 독실한 신앙과 불경한 행동이 공존하는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다.

비극은 갑작스럽게 다가와 뒤통수를 친다. 오코너의 작품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인간의 민낯을 목도하게 만든다. 오코너는 기이하고 극단적인 방식을 통해서 삶의 진실과 대면할 수 있으며, 이때 비로소 성숙한 자기 인식의 기회가 마련돼 초월적 신비(은총)를 깨닫는다고 여겼다.

서른두 살의 백수 철학박사 헐가는 권위적인 어머니와 함께 산다. 헐가는 10살 때 사냥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고 자신이 허무주의자라는 데 자부심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성경책을 방문 판매하는 시골 청년 맨리 포인터의 유혹에 넘어가 그 열정에 몸을 맡긴다. 하지만 헛간 이층 다락방에서 돌연 자신의 본성을 드러낸 청년은 헐가의 의족을 빼앗더니 모욕만 주고 사라진다. 단편 소설 ‘좋은 시골 사람들’의 줄거리다.

소설은 제목과 상반된 인간의 이중성을 결론에서 강렬하게 보여준다. 의족을 갖고 달아나는 청년에게 “내 다리 내놔”라고 소리치는 헐가의 모습은 섬뜩하고 기괴하다. 헐가의 엄마는 성경책을 판다는 이유만으로 청년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시골 사람들은 선하다는 말을 한다. 인간은 내면의 어둠을 간직하며 감쪽같이 타인을 속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가는 그것이 인간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과연 시골 사람은 모두 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성경책을 판매한다고 선한 것은 아니다.

오코너는 인간성의 가장 불쾌한 부분을 탐구하면서도 구원을 향한 문을 살짝 열어 놓는다. 그녀가 집요한 붓끝으로 그려낸 냉소적인 인간들은 마치 “인간은 이렇게 악하고 보잘것없고, 눈물도 자비도 없는 불쌍한 존재야”라고 말하는 듯하다. 자기 기만의 가면이 감자껍질처럼 벗겨질 때 우린 수치심을 느낀다. 그러나 깊은 신앙으로 얻어진 깨달음은 탁월한 차원을 획득한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가 다양하지만 결국 등장 인물에게 일어나는 은총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

섬뜩함과 묵시를 넘나드는 오코너의 작품 속엔 선과 악이라는 종교적 주제가 흐른다. 종교와 법, 윤리가 삶의 테두리가 돼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환상은 작품 안에서 완벽하게 깨진다. 그녀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다가 아니라 세상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신비가 있다는 것을 강렬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이런 작가적 관점은 아마 그녀가 평생 영적 씨름을 통해 얻은 것일 것이다.

“관점, 그것은 절대 완성되지 않는 평생의 씨름이 될 것이다. 뭔가가 마무리되면 인간은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 오직 씨름만 있을 뿐이다. 그런 씨름 자체를 소유하려 들면 우리의 삶 전체가 소진된다. 그 씨름을 귀하게 여기고 이 생 너머의 최후 완성을 지향해야만 비로소 그것이 가치 있게 된다. 나는 가능한 최고의 예술가가 되고 싶다.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서 말이다.”(1947년 4월 어느날 일기)
 
난 이야기의 도구일 뿐

오코너는 짧은 생애 동안 겸손을 잃지 않도록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당신 이야기의 도구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마치 제 타자기가 제 도구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 이야기가 퇴고 과정에서 지나치게 명료해져서 거짓되고 천박한 해석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왜냐면 저는 이야기에서 어떤 사람의 종교도 폄하하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입니다.”(‘기도 일기’ 중) 또 “기독교의 원칙들이 제 글에 스며들게 해 주시고 제 글들이 충분히 출판돼 기독교의 원칙들이 세상에 스며들게 해 주십시오. 오 주님 신앙을 잃을까 봐 몹시 두렵습니다.…지옥이 두려워서 당신 곁에 남아있는 겁쟁이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기도 일기’ 중)라고 말했다.

‘기도 일기’는 그녀가 저널리즘을 공부하러 갔다가 작가 지망생으로 전환한 아이오와대학 시절 쓴 것이다. 기도 일기를 통해 오코너가 하나님과 맺었던 특별한 관계와 문학을 향한 열망을 엿볼 수 있다.

오코너의 ‘기도 일기’에서 드러난 것처럼 그녀가 가진 예술적 비전의 특징은 겸손이었다. 그녀는 늘 자신이 이야기꾼일 뿐이라고 말했다. 날짜 미상의 어느 날의 기도 일기는 현재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나의 하나님 당신이 무언가를 주시기 전까지는 인간이란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심지어 기도할 때도 당신이 우리 안에서 기도를 하셔야 기도가 됩니다. 저는 아름다운 기도를 쓰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자원이 제게는 없습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제가 드리우는 그림자가 너무 커져서 달 전체를 가려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그 그림자로 자신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막고 있으므로 하나님 당신을 저는 모릅니다. 저 자신을 밀어내 놓게 도와주십시오.…저는 당신을 이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사랑하고 싶습니다.”

이지현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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