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기념일, 반응



이상하리만치 모든 게 안 풀리는 날이었다. 출근길부터 잘못 들어 한참 돌고, 소소한 일정들마다 어긋나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저녁쯤 되니 진이 다 빠져, 예전 같으면 그냥 웃고 넘길 일에도 씩씩대다 부루퉁해졌다. 애초 이렇게까지 힘들 일정이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꼬였나 생각하다 잠들기 직전에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이 즈음 은사님이 비명에 돌아가셨다. 우연히 시선을 돌린 TV 화면. 뉴스 속보 타이틀을 보는 순간 나는 내가 울부짖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악을 썼다. 1년간 공식적인 어느 자리에서도 나는 그 일을 입에 담지 못했다. 범죄 피해 유가족들을 위한 센터에서 일을 하건만, 정작 나 스스로에겐 전문가가 될 수 없었다. 한 해가 지나고 찬바람이 불어오자 ‘기념일 반응’(anniversary reaction, 중대한 부정적 사건 발생 1년 전후로 심리적 고통 반응이 다시 일어나는 현상)이 내게도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끼고는 그만 겁에 질렸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지만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가까운 이의 상실부터 심각한 폭력, 범죄, 재난의 상황까지. 뇌에 비상 알람이 울리는 경험을 한 이에게 흔히들 ‘시간이 약’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뇌는 그 시기마다 묵혔던 알람을 다시 울린다. 문화마다 어떻게든 그 알람을 다스리고자 ‘기일’의 전통으로 덮으려 해도 내면의 알람을 강제로 끌 묘책은 없다. 시기가 다가오면 태풍 예보에 준비하듯 마음을 대비할 뿐. 알람이 지나치게 커서 생활을 망가뜨릴 것 같다면 전문가를 찾아야 한다. 그럴 정도는 아니어도 알람의 강도를 낮출, 나에게 맞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활동들을 반복하며 마음을 다독일 필요가 있다. 가장 흔한 방법으로는 몸과 마음의 고통을 다스리도록 잘 자고 쉬면서, 짧게라도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비단 개인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참 많은 ‘기념일 반응’들이 존재한다. 지금도 세계는 수없이 많은 고통이 터져 나올 위기 한복판에 있다. 각자의 기념일 반응에 보듬을 새도 없이 새로운 고통들이 대규모로 시작된다면 이 고통의 대가는 일회성 폭우가 아닌 끝없는 재난이 될 것이라 요즘 마음이 더 안타깝다.

배승민 의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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