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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반대편 손주들 보고플 때 끄적이고 그렸는데… 77살에 스타될지 몰랐지”

4년 전 브라질 이민생활 도중 한국으로 떠나보낸 손주들이 그리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다 ‘인스타그램 스타’가 된 안경자(왼쪽)·이찬재씨 부부가 14일 경기도 부천의 자택에서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부천=이병주 기자


이찬재(왼쪽 세 번째)씨와 안경자(가운데)씨가 지난 7월 서울 종로구 삼청동 주한 브라질대사관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아들 지별씨, 딸 미루씨, 손주 알뚤과 알란, 아스트로와 함께 촬영한 사진. 이미루씨 제공




“우리에게도 젊은날이 있었다. 꿈이 있었고 힘겨운 나날도 있었지. 머리와 가슴 속에는 지식과 체험의 지혜가 가득 차 있다는 걸 너희는 아는지.”

지구 반대편에 사는 손주들이 그리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다 지금은 39만명이 넘는 인스타그램 팔로어를 두게 된 77세 동갑내기 부부 이찬재·안경자씨. 국어교사였던 안씨가 글을 쓰면 남편 이씨가 그림을 그린다. 젊은날을 회상하며 쓴 글에는 네 명의 아이들이 풍선을 들고 두 팔 벌려 서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품으로 뛰어오는 그림이 달려 있다. 이 게시물에 6600여명이 ‘하트’를 보냈다. 이씨 부부가 올린 글과 그림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 모습이 대부분이다. 아내가 남편의 등을 긁어주고, 감나무 아래 평상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모습들이다.

이씨 부부와 딸 미루(44)씨를 지난 14일 경기도 부천의 자택에서 만났다. 부부는 4년 전 브라질 이민생활 당시 함께 살던 손주들을 한국으로 먼저 떠나보낸 이후 인스타그램에 글과 그림을 올리다가 일약 ‘인스타 스타’가 됐다. 지금은 이씨와 안씨도 “할아버지 할머니랑 같이 살고 싶다”는 손주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2017년 한국으로 들어와 딸의 집 근처에서 살고 있다.

안씨는 손수 커피를 내리며 “브라질에선 커피를 훨씬 진하게 먹어요. 그래야 깊은 맛이 나거든”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씨 부부는 캠퍼스커플로 만나 결혼한 뒤 1981년 브라질로 이민을 갔다. 낯선 나라에서 아들 지별과 딸 미루씨를 낳아 키웠고 미루씨의 자녀 알뚤(15)과 알란(14), 지별씨의 자녀 아스트로(4), 루아(1)까지 네 명의 손주를 가족으로 맞았다.

이씨는 은퇴 후 손주들의 등하굣길을 책임지는 즐거움으로 지냈다. 자녀에게는 평생 무뚝뚝한 아버지였지만, 손주들 앞에선 한없이 따뜻한 할아버지로 변신했다.

그러던 딸네 가족은 개인 사정으로 한국으로 돌아가게 돼 이씨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아들은 대학생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간 뒤 일찍이 뉴욕에서 자리를 잡은 상황이었다. 브라질에 남은 이씨 부부의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2015년 6월 이씨 가족이 뉴욕의 한 식당에 모였다. 갓 태어난 손자 아스트로를 안고 있던 이씨는 “이 아이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될까”라고 했다. 이 한마디가 가족들을 움직였다고 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들의 미래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크게 다가온 것이다.

지별씨는 아버지에게 손주들을 위한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고, 어머니에겐 글 쓰는 일을 맡겼다. 이렇게 만든 작품을 인스타그램에 올려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보라고 권한 것도 지별씨였다. 미루씨도 옆에서 적극 응원했다. 안씨는 미루씨 손등을 어루만지며 “아이들이 우리가 맨날 TV만 보고 있진 않을까, 손주들 생각만 하면서 무기력하게 지내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에 그랬던 것”이라고 말했다.

“무섭지. 막 무서웠어.” 안씨는 인스타그램을 처음 시작했을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이들에게 젊은 사람들이 주로 하는 소셜미디어는 낯선 세계였다. 어렵사리 올린 글과 그림에 댓글이 달리는 게 신기해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이씨 부부의 작품은 ‘가족 협업’의 결과물이다. 이씨 부부와 자녀가 모두 ‘오케이’를 해야 인스타그램에 올릴 수 있다. 서로 의견이 다르면 그림과 글을 놓고 치열한 토론이 오간다. 가족 회의는 페이스북 메신저로 이뤄진다. 안씨는 “가족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시작조차 못했을 일”이라며 “인스타그램을 하면서 가족 간 우애가 더 깊어졌다”고 말했다.

“잊지 마라, 아로(아스트로)야. 할아버지 할머니는 무조건 네 편이다. 네가 제일 좋다.” 안씨의 따뜻한 글들은 아들과 딸이 각각 영어와 포르투갈어로 번역해 올린다. 미국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등 각국의 사람들이 이씨 부부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어하는 이유다. 이씨 부부는 지난 5월 미국 국제 디지털 예술 및 과학 아카데미가 주관하는 웨비상을 받았다. 웨비상은 인터넷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린다.

유명 인사도 아닌 평범한 노부부의 이야기가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루씨는 “댓글에 답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씨 부부가 올린 글에는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생각이 난다’ ‘부모님 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연락드려야겠다’는 댓글들이 달려 있다. 미루씨는 “한국 사회는 ‘혼밥’ ‘혼술’이 일상화될 정도로 개인주의가 만연해 있는데 많은 분들이 부모님의 글과 그림을 보고 잠시나마 위로를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안씨는 “젊은 사람들이 왜 우리 인스타그램을 좋아하는지는 우리도 연구 중”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이들은 “우리도 평범한 가족”이라고 강조했다. 미루씨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우애가 깊은 가족이 아니었다”며 “어떤 때는 싸우기도 하고 나쁜 말도 하는 보통 가족”이라고 했다.

이 가족이 다르다면 다르다고 할 수 있는 점은 서로를 향한 작은 관심이다. 이씨는 “아들이 내게 인스타그램을 하라고 권한 것도 그림 그리기에 흥미가 있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교사 시절 직접 그린 그림엽서를 학생들에게 주는 따뜻한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안씨는 “자녀들이 ‘우리 부모님은 무슨 일을 좋아하는지’ 조금만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루씨는 “가족끼리 하는 활동이 잦은 브라질 문화도 영향을 끼쳤다”고 덧붙였다.

이씨 부부는 노인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 다소 아쉽다는 점도 이야기했다. 안씨는 “브라질에서는 못 느꼈는데 한국에선 노인이라고 하면 일단 선부터 긋는다”며 “한국에 와서 폭삭 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최근 동창회에 반바지를 입고 갔더니 ‘그 나이에 그래도 되느냐’는 눈총을 받았다고 한다. 안씨는 “늙어버린 모습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노인들 마음속에도 꿈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조민아 기자 minaj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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