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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코너-노석철] 기업들을 희생양으로 내줄 순 없다



“정부가 나서봐야 뾰족한 수가 있겠나. 사태만 더 키울 수 있다.” “전략적 모호성은 무능하거나 비겁한 게 아니다.” “지금은 눈치보기를 할 수밖에 없다.”

중국 정부가 삼성과 SK하이닉스 등 글로벌 기업들을 불러 ‘트럼프의 압박에 협조하면 응징할 것’이라고 위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베이징의 한국 기업인들에게 나오는 반응이다. 현재로서는 우리 정부가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게 기업들을 도와주는 것이란 취지다. 그러나 한국 내 여론은 아주 다른 것 같다. 중국의 행태에 분노하면서 우리 정부에도 뒷짐지고 방관한다는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이 난리가 났는데 기업을 보호해야 할 국가는 뭐하고 있느냐, 핵심 안보 동맹국인 미국이 ‘화웨이 죽이기’ 동참을 요구하고 중국은 응징을 거론하는데 무책임하게 침묵하느냐는 것이다. 심지어 유럽 일부 국가들이나 일본이 반(反)화웨이 전선에 동참했는데 우리도 입장표명을 해야 한다며 은근히 줄서기를 종용하는 주장까지 나온다.

정부는 여전히 “이번 건은 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해야 할 사안”이라는 입장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는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쪽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유럽과 아시아, 남미 등 각국마다 화웨이 대응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양다리 외교의 고수인 일본에서 주요 통신사들이 반화웨이에 동참한 것은 그들 나름대로 계산이 있을 터이다. 우리는 우리대로 판단하면 된다. 우리 정부가 나서서 해결하라는 압박은 기업들을 사지로 내모는 빌미가 될 수 있다.

정부가 입장 표명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정부가 “화웨이에 부품 공급을 중단토록 하겠다”고 발표할 수 있을까. 화웨이와의 거래를 끊는다면 후폭풍은 우리 기업들이 감당하기 어렵다. 우리 기업들은 화웨이에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뿐 아니라 각종 부품 등 연간 12조원대 제품을 공급하며 복잡하게 얽혀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매출의 20%가량을 중국에서 거뒀고, SK하이닉스의 중국 매출 비중은 40%에 근접했다. 두 회사는 중국에서 대규모 공장도 운영하고 있다. 우리 정부가 반화웨이를 선언하면 두 회사는 중국에서 발이 묶일 수 있다.

그렇다고 미국의 요구를 대놓고 거절하기도 어렵다. 우리는 미국과는 경제·무역뿐 아니라 안보 동맹으로 엮여 있다. 미국은 지금 중국을 꺾지 않으면 더이상 기회가 없다는 벼랑끝 심정으로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 미국의 면전에서 정부가 ‘반화웨이에 반대한다’고 선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개별 기업들의 판단에 맡기는 게 낫다. 화웨이와 얽혀 있는 LG유플러스나 KT 등도 스스로 판단해 처신하면 된다.

우리는 사드 갈등 때 롯데를 희생양으로 내줬다. 롯데 골프장 부지에 사드를 배치해 롯데를 중국의 분풀이 대상으로 만들었다. 안보 문제에 민간 기업을 끌어들여 초토화시킨 셈이다. 사드 문제는 우리가 직접적 당사자였지만 화웨이 사태는 거대 패권국 미·중이 벌이는 무역전쟁의 파편이다. 세계 각국이 우리처럼 ‘누구 편에 서겠느냐’는 협박을 받고 있다. 싱가포르 외교장관도 “미국이냐 중국이냐는 억지 선택을 강요당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만 난처한 처지가 아니다. 성급하게 나섰다가 한쪽의 앙숙이 되는 걸 자초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다만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라는 것이 외교적인 노력까지 포기한 채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는 아니다. 양쪽의 마음을 다 얻으려면 물밑에서는 몇 배의 외교적 노력이 투입돼야 한다. 이번 사태는 철저하게 기업의 피해나 이익을 중심에 놓고 판단해야 한다. 실리가 가장 중요하다. 기업들의 명운이 걸린 시기에 명분이나 의리, 자존심은 사치일 수 있다.

뜬금없지만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이병헌 대사를 다시 곱씹어보자.

“부끄러운줄 아시오. 그깟 사대의 명분이 뭐길래 2만의 백성들을 사지로 내몰라는 것이오. 백성이 지아비라고 부르는 왕이라면 빼앗고 훔치고 빌어먹을지언정 내 그들을 살려야겠소.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백 갑절 더 소중하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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