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최주혜] 작은 물결



어릴 적 생일보다 더 기다리던 날이 어린이날이었다. 이날만은 좀 까불어도 혼나지 않을 수 있는 면책 특권이 주어지기도 했다. 지금은 까마득한 옛 추억이 되었지만 어린이날 즈음에 설레던 기분은 아직도 생생하다. 소파 방정환 선생(1899~1931)은 어린이날과 함께 자연스레 떠오르는 인물이다. 선생은 평생 어린이의 인권을 위해 헌신했던 아동 운동의 선구자였다.

“오늘은 우리를 위한 날이에요. 어린이날 선언문을 읽어 보세요!” 1923년 5월 1일, 제1회 어린이날 기념식이 열렸다. 기념식에 참석한 어린이들은 방정환 선생이 만든 ‘어린이 선언문’을 낭독하고 50명씩 무리 지어 경성시내를 돌며 선언문을 나눠줬다. 선언문의 핵심은 어린이를 물건처럼 함부로 대하지 말며, 노동에서 해방시켜 마음껏 놀며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의무교육이 없던 때라 어린이 대부분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농촌에서는 농사일에 시달렸고, 도시에서는 허드렛일에 내몰렸다. 뿌리 깊은 유교 사회에서 어린이의 사회적 서열은 언제나 제일 밑바닥이었다. 일제의 탄압 또한 어린이의 삶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었다

최초의 아동 인권 선언으로 알려진 제네바 어린이 권리 선언은 1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어린이의 삶을 돌보자는 취지로 1924년 채택되었다.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선언문이 1년 앞섰으니 세계 최초의 아동 인권 선언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겠다. 이처럼 앞서가는 행보를 보여줬던 선생은 안타깝게도 그리 길지 않은 생을 살다 가셨다. 선생은 병석에서 이런 말을 남기셨다. “내가 하는 일이 당장 큰 효과가 없을지라도 언젠가는 조선에 작은 물결처럼 쉼 없이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올해는 방정환 선생 탄생 120주년이고 제97회 어린이날이 있는 해이기도 하다. 아동 인권의 토대가 마련된 지도 100년이 다 되어간다. 그러나 여전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과 같이 얕보고 비하하는 말들이 쓰인다. 선생의 호 소파는 ‘작은 물결’이라는 뜻이다. 세상의 모든 어른과 어린이에게 선생의 뜻이 작은 물결이 되어 흘러가 닿기를 바란다.

최주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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