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의경] 소등



며칠 전 친구 집을 방문했다. 친구 남편이 출장 간 틈을 타 하룻밤을 친구 집에서 보낼 생각이었다. 자주 보지 못하는 친구와 밤새 속닥거릴 생각을 하니 기분이 설렜다. 벨을 누르자 친구와 친구의 네 살짜리 아들이 반겨주었다. 얼마 전까지 기어 다닌 것 같은데. 아이는 어느새 부쩍 자라 있었다. 저녁을 먹은 뒤 친구가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왔다. 내가 과도를 들어 사과를 깎으려는데 친구가 말했다. “어머, 몇 시야? 아직 8시 안 됐지?” 내가 7시55분이라고 하자 친구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늘 지구의 날이잖아. 8시에 소등 행사 참여하려고.” 나는 소파 위에서 장난감을 갖고 노는 친구 아들을 보며 말했다. “갑자기 불 끄면 놀라지 않을까?”

친구가 아이에게 다가가 소등 행사에 대해 설명했다. “오늘은 지구의 날이야. 지구의 날에는 사람들이 동시에 불을 꺼서 지구가 쉬게 해줘. 많은 사람이 함께할수록 절약 효과가 크다고 해서 엄마도 하려고 해. 그러니까 갑자기 깜깜해져도 놀라지 마.” 아이가 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불 끄면 지구가 쉬는 거야?” 친구가 답했다. “응. 하루 종일 일하는 지구가 1년에 한 번 10분간 쉬는 거야.” 아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가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 “사실은 같은 어린이집 다니는 엄마들이랑 다 같이 하기로 했어. 교육상 좋대.” 지구 환경보호의 날은 환경오염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서 자연보호자들이 제정한 날로, 매년 4월 22일이다.

친구는 냉장고, 공기청정기를 비롯한 가전기구들의 플러그를 뽑고 휴대전화 전원도 끈 다음 벽시계를 보며 거실 불을 끄는 스위치를 향해 다가갔다. 초침이 8시를 가리킨 순간 암흑이 찾아왔다. 잠시 후 아이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던 아이가 10분간 잠잠했다. 아이는 자는 것 같지 않았지만 엄마의 무릎을 벤 채로 가만히 있었다. 나는 불을 켠 다음 아이에게 무섭지 않았냐고 물었다. 아이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나도 쉬었어. 엄마랑 이모도 쉬었어?” 아이의 말에 웃음이 났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우리 인간도 지구의 일부라는 사실을.

김의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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