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신용목] 제 몫을 다하며 지나간다



이제 나에게도 십 대 자녀를 둔 친구들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최근 한 친구의 고민은 자녀가 말도 잘 안 섞을 뿐더러 아예 제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도무지 가족모임에 끼지 않으려 하는 것도 거슬리는데, 일기장에 ‘죽음’이란 단어를 써놓았다며 걱정했다. 친구는 이른 사춘기를 맞이한 자녀의 버릇없음을 대놓고 나무라야겠다고 화를 내기도 하고, 혹여 자녀가 잘못된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하기도 하며, 새삼 처음인 부모 역할에 당황하고 있었다. 부모의 일이라면 내가 영원히 알 수 없는 영역이니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여전히 부모의 입장보다는 아이의 입장에서 모든 일을 바라보는 게 더 익숙하다고 해야 한다. 어른들이 세상 물정을 좀 알고 순응하거나 잘 대처하는 것을 두고 철들었다고 말하는 것과 달리, 아직도 나는 세상과 어긋난 마음이 많고 그 물정 앞에서 헤매는 일이 잦다.

그래서 어떤 근심의 무게와 삶의 깊이에 대해 비록 무지한 처지지만, 미성년으로 머무는 것이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철들지 않아서 혹은 아이 같아서 보게 되는 진실도 세상에는 있으니까 말이다. 자기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한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친구에게 화낼 일도 크게 걱정할 일도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도 자녀였기 때문이다. 세상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아니 살아보기도 전에 정해진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오히려 사는 게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이며 인생의 숱한 이유들에 대해 묻고 또 물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우주의 끝으로 뻗어 나가 삶과 죽음에 맞서 싸우는 마음에게 가족모임이 중요할 리 없었다. 살아갈수록 우주는 점점 작아져서 한 채의 집이 되고 한 장의 명함이 돼버렸으니, 많이 살았다고 큰 생각을 갖는다는 말은 거짓이다. 그러니 저 우주 속에서 삶과 죽음의 비밀 가운데를 헤매는 자를 억지로 끌어내려 좁은 상자에 가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조금은 슬픈 느낌으로 하루를 사는 것처럼 사춘기의 그 자녀도 언젠가는 자신을 지나갔던 소중한 순간조차 잊을 날이 오겠지만, 잊어버릴 순간이라고 해서 없어도 좋은 시절은 아닐 것이다. 모든 시절은 제 몫을 다하며 지나간다.

신용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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