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신용목] 사랑을 지켜주는 나라



세상에는 일관되게 지켜야 하는 원칙이 있다. 예컨대 ‘인권’ 같은 것. 그것이 아무리 기본이라 할지라도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배웠다.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뿐 아니라 여성과 소수자, 권위적인 조직문화 개선과 갑질 반대 운동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계속되는 싸움이 인권을 지켜내기 위한 과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한 이견이 있지만 대부분 논란거리가 못 되는 것들이다. 어떤 정권이나 정책도 인간의 인간다움을 해친 자리에 서 있는 이상 자기 정당성을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가치를 일컫는 표현들이 대체로 그렇듯, ‘인권’ 혹은 ‘존엄성’도 인간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나약한 개념에 불과하다. 불행히도 그 믿음의 근원은 과학적이거나 물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유전학적으로 인간이 침팬지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란 쉽지 않으며, 제도적으로 개미의 그것보다 인간 사회가 더 훌륭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어쩌면 종교나 철학은 그 나약함을 무찌르기 위해 신적 선언이나 복잡한 논거로 무장한 믿음의 군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믿음의 근원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통해 개념을 확신으로 바꿔놓는가. 내가 보기엔 ‘사랑’이다. 우리에게는 명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며 그로써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실체가 있다. 서로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미래를 꿈꾸게 만드는 것. 그리하여 그 아름다움을 해치는 대상을 향해 분노하게 만드는 것. 종교와 철학이 마침내 사랑을 설파했던 이유도 그렇거니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쟁과 혁명과 정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애국심’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시스템이 인간을 지우고 자본을 위해 작동하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국가는 국민을 지우고 오직 권력을 위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구성원들의 사랑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구성원들로부터 사랑받으려는 순간 파시즘이 탄생한다. 물론 일제나 독재와 싸우기 위해 애국심이 필요했던 적이 있다. 그들이 사랑했던 나라는, 나라를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서로의 사랑을 지켜주는 나라였다. 그것을 국가 권력을 향한 눈먼 욕망과 똑같은 선상에 놓으면 안 된다.

신용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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