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신용목] 믿음을 의심하는 믿음



최근 발표된 안희연 시인의 ‘추리극’이란 시가 있다. 마음의 미로를 헤매는 사람의 그 마음을 그린 시.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건 정확하지 않다. 전문을 인용할 수 없으니 아쉬운 대로 이렇게 옮겨본다. 내 존재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내 속의 존재가 매일 바뀌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시는 “나”는 “아흔아홉 마리 양과 한 마리 늑대”로부터 시작되었고 “매일 한 마리씩, 양은 늑대로 변한다”고 말한다. 그냥 변하기만 하면, 그래서 ‘백 마리의 늑대’가 되고 말면, 아무런 고통도 없을 것이다. 그 와중에 헤매게 되는 ‘미로’가 있는 게 문제다. ‘천사, 영혼, 진심, 비밀’과 같은, 이제는 아무도 믿지 않는, 저 무력한 말들 속에 갇히는 것이다. 세상이 요구하는 직선적인 과정을 뒤로 물린 채, 못내 사로잡히고 마는 생의 신비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시는, 이제 내겐 ‘아흔아홉 마리의 늑대’가 있지만, ‘백 마리의 늑대’가 되지 않기 위해 “한 마리 양은 언제고 늑대의 맞은편에 있다”로 끝맺는다.

나는 이 시를 여러 번은 읽었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아파서였다. 끝까지 한 마리 양으로 버티겠다는 데서 ‘결기’가 아니라 ‘고통’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물론 그 단서도 시에 있다. “미로는 헤맬 줄 아는 마음에게만 열리는 시간”이라는 것. 신념이나 의지는 한 번 박으면 굳건히 서 있는 기둥이 아니다. 흔들리기 마련이다. 하물며 성공과 성취를 쫓는 자들이 보자면, 무력한 말을 붙들고 헤매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천사나 영혼, 진심, 비밀 같은 것이 없다면 세상은 더 참혹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어리석다고 말하는 이들조차도 실상은 그들에게 빚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하게 읽고 말면 안 된다. 어떤 신념과 의지에게 흔들림은 ‘속성’이 아니라 ‘본질’일 수도 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의심하는 믿음. 중요한 것은 한 마리 양으로 버티는 결기가 아니라 양과 늑대 사이의 ‘미로’이다. 그 사이에 마음이 있고 방황이 있고 고통이 있다. 그게 이 시가 말하는 ‘삶의 영원한 미스터리’일 것이다.

신용목 시인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