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신용목] 시를 위한 변명



시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나 현상을 접할 때마다 나는 공룡이 떠오른다. 생각해보자. 먼 숲이나 바다에 공룡이 살고 있어서 여태 우리에게 위협을 가한다면, 주말마다 공룡의 발자국을 찾아 나서고 그들의 뼈를 일으키기 위해 박물관을 짓고, 집집마다 실리콘으로 만든 모형을 두고 아이들은 그 이름을 달달 외웠을까. 비록 멸망하지 않았으나 시는 지긋지긋한 관계가 끝나버린 후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사랑 같은 데가 있다. 저기 먼 곳에서 온전히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 어쩌면 죽은 채로 미래가 되어버린 것. 읽고 쓰는 일조차 영원히 지속되는 추모의 절차로 삼으면서, 곳곳에서 환기되고 떠들어지며 상상되는 무언가가 아닐까.

그런데, 이게 시에 관한 비유였던지라 인과의 배반이 끼어든다. 정작 사라진 것은 시가 아니고 시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하는 것.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시인끼리 밥을 먹다 한 사람이 “노을 참 아름답다”고 말하면, 다른 사람이 “밥 먹는 데 일 이야기 하지 마”라고 한다는. 그러나 이제 이런 농담은 통하지 않을 듯하다. 한때 시와 아름다움을 한 몸처럼 여겼지만 요즘 시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머니까. 노래 가사나 드라마의 장면들, 하다못해 TV 광고가 더 ‘시적’이고, 정작 시는 시적이기는커녕 어렵기만 하다. 그래서 요즘 시는 시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네들만의 성에 갇혀 산다고 시인들을 탓하는 사람도 있다.

다 틀렸다고 우길 생각은 없지만 꼭 그 때문은 아닐 것이다. 시가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것은 그것이 ‘인간’과 ‘사랑’의 증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적이다’고 불리는 아름다움조차 우리를 현혹하는 자본의 기술이 된 시대라면, 시가 찾아 나서는 ‘인간’과 ‘사랑’은 더 깊은 곳에 버려져 있지 않겠는가. 아름다움을 대신할 증표를 찾기 위해 시는 세계의 더 깊은 곳을 파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생각해보자. 어느 날 공룡이 주인공인 영화가 극장가를 장악하고 매일매일 우리는 공룡의 사체를 태우며 집을 데우고 도로를 달린다. 아득한 지층으로 사라져버렸지만, 우리는 오랜 시간 그들로부터 일상과 일상 너머의 상상력을 제공받고 있다. 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신용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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