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신용목] 삶은 그렇게 특별해진다



왜 인간은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입에 넣은 사탕이 다 녹기도 전에 둘로 쪼개져 불안했던 적이 있다. 그날은 누군가와 결별할 것 같았고 위태롭던 사랑이 끝날 것 같았다. 쪼개진 사탕을 억지로 붙여놓으려고 했을 때 느꼈던 한 뭉텅이 반죽 같던 혀의 우둔함. 나는 그날의 불행을 모두 사탕 탓으로 돌렸다. 그때 사탕은 사탕을 넘어서 일순간 전능해졌던 것이다.

‘의미’의 거처가 시시콜콜한 개인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도 그렇다. 농사가 중요했던 시대야 적절한 때 씨를 뿌리고 거두기 위해 절기와 명절이 필요했다지만, 지금이야 그 상징만 남은 셈이니 구태여 따지지 않아도 그만일 것이다. 사는 일에 지쳐서이겠지만 최근에 나는 새해가 오는 것도 기념일을 맞는 것도 귀찮다고 말하는 친구들을 자주 만났다. 세상은 자본으로 향하는 외길 외에는 어떤 길도 보여주지 않고 있으니, 이제 자연의 섭리나 인연의 가치 따위를 챙기는 일은 사치라고 주장한들 딱히 반론할 사정이 없을 때가 많다.

하지만 정말 우리에게 기념해야 할 날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어떨까. 시작도 끝도 없는 연속만을 보여주는 죽은 시간들을 우리가 견뎌낼 수 있을까. 좀 번거롭더라도 우리에게는 되새길 만한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냥 흘러가버리는 세월에 동그라미를 쳐놓는 것으로라도 말이다. 일상의 모든 것이 상실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시간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기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다시 태어날 수는 없지만, 생일은 해마다 돌아와야 한다. 인간에게 재생과 윤회가 가능하다면 온전히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새로운 ‘나’를 맞이하는 그 순간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의미’란 게 도대체 무엇이냐고? 콕 집어 말할 수 없으니 안타깝다. 한편 그것을 미리 안다면 삶이 금방 시시해지지 않겠는가. 삶의 이유가 분명하다면 남은 삶은 거기 종속되어 버리고 말 테니까. 삶의 의미는 끝없이 유예됨으로써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다만 카페의 음악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떠오르게 만들거나 붉은 노을이 앞사람의 뺨을 따뜻하게 적시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으로 얼핏얼핏 그 힌트를 던져주면서 말이다.

신용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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