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황시운] 가벼운 다짐



지난 일기장을 정리했다. 연말이면 으레 하는 연례행사일 뿐, 특별한 의미는 없다. 물론 내게도 일기장을 정리하며 지난해를 반성하고 다가올 해를 계획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러지 않는다. 무엇 하러 지키지도 못할 다짐을 반복하며 스스로 의지박약함을 탓하겠나. 그깟 다이어트에 실패한다고, 책 좀 덜 읽는다고, 장편 탈고를 미룬다고, 저축 좀 못 한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목표는 크고 높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드높은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며 크고 작은 실패를 경험하는 과정이야말로 진짜 인생이라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다. 내가 도달하고 싶은 세상이 어떤 곳인지 미처 생각해보기도 전에 그럴듯한 계획부터 세우기 시작했다. 방학이 되면 스케치북에 커다란 원을 그린 뒤 보기 좋게 구획을 나눴고, 좀 더 자라선 걸핏하면 시간대별로 공부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목표 없이 세운 계획은 어그러지기 일쑤였고 성취 대신 실패의 경험들만 쌓여갔다. 목표도 없이 계획만 세우고 있다는 자각이 든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그 시절이 무의미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땐 그래야 할 시기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다만,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느낄 뿐이다.

계획은 느슨하고 다짐은 가볍게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저 사소한 일 한두 가지 정도만 계획하고 다짐하는 거로도 충분하다. 물론 누구나 그렇듯 나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한 노력은 하고 있다. 장애로 인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인내와 노력이 필요할 때도 많다. 하지만 결국엔 그 모두가 일상일 뿐이다. 어떤 날은 바쁘게, 또 어떤 날은 한가하게 흘러가는 일상. 간혹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고, 때론 예기치 못한 성취감을 맛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대수로울 것 없이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 말이다. 안 그래도 견뎌야 할 것이 많은 삶인데 굳이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다짐의 무게까지 감당하며 살아갈 건 무얼까. 그렇게 흘려보내기에 남은 생은 너무도 짧고 세상은 불확실하기만 하다.

황시운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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