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황시운] 젊음을 탕진할 권리



‘엄친아’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선천적인 재능에 후천적인 노력을 더해 모든 면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이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무엇이든 잘해서 나를 주눅 들게 했던 엄친아들은 엄마의 잔소리 속에는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 실체를 확인한 적은 없었다. 마치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제로 보았다는 이는 없는 전설 속의 동물, 유니콘이나 용처럼 말이다. 요즘도 엄친아라는 말을 쓰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을 뭐라 지칭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이미 전설이 되어 어느 한 시절의 내게 그랬듯 누군가를 끝없이 주눅 들게 하고 있을 테니까.

이 전설 속 존재들의 무용담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질 즈음 대대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험의 결과가 발표돼 고득점자들의 사연이 각종 대중매체를 도배하면서 정점을 찍는다. 드디어 유니콘의 마법이 시작되고 여의주를 문 용이 승천하는 것이다. 시험에서 낭패를 본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들의 이야기는 힘을 얻는다. 역대 최고의 불수능이었다는 올해는 군대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공부한 두 장병과 백혈병을 앓으면서도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는 학생의 사연이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들의 사연을 접한 부모들은 다가올 1년간 사용할 강력한 엄친아 사연을 장착했을 테니, 그들과 나란히 비교 선상에 놓일 아이들에겐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힘든 상황에서 고득점을 올린 이들의 노력을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든 이들이 그들처럼 공부에 몰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며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어떤 시기를 극복하라고 요구하는 건 지나치게 폭력적이다. 아이들은 존재 자체로 이미 충분히 빛난다. 또 아이들에겐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젊음을 탕진할 권리가 있다. 그들의 젊음은 극복해야 할 역경이 아니라 만끽해야 할 축복이라는 걸, 젊음을 지나쳐온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물론 아는 것을 아는 대로 실천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말이다.

황시운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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